Pivot (피벗)
<2001년 7월 4일>
"월요일에 신임 연구소장님께서 면담을 요청하셔서 이력서까지 들고 면담을 하고 왔다. 석사급 이상 연구원 중에서 영어와 컴퓨터 사용이 원활하고, 대인관계 및 정보조사 능력 등이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했다. 그리고 면담 바로 다음날인 어제, 전화로 자신의 결정을 내게 알려주셨다. 앞으로 연구소에서의 내 역할이 바뀌게 될 것 같다."
연구원으로 일한 지 만 4년쯤 되었을 때, 회사는 불안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많은 동료들이 벤처기업에 합류하겠다며 회사를 떠나면서 연구소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나 역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 무렵,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는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나서 창업과 벤처 붐이 한창 몰아치던 때였다.
그 와중에, 우리 회사에는 새로운 연구소장님이 오신다고 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글로벌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신 L 박사님. 그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말단 연구원인 나에게도 존댓말을 해주셨고, 회의 때도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기보다는 경청해 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시야와 관점은 확실히 글로벌 회사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분이 왠지 좀 멋있다고 생각했다.
소장님은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오셨던 만큼 한국의 기업환경에 익숙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본인의 손발처럼 일해 줄 수 있는 ‘똘똘한 비서’ 혹은 ‘참모’ 같은 사람의 도움을 원하셨는데 뜻밖에도 그 역할에 내가 발탁되었던 것이다. 연구소장님의 어깨너머로 나는 회사 전체의 연구방향과 전략이라는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소장님이 부임하신 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회사 내의 연구 프로젝트들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소장님은 기존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며, 일부는 과감히 중단하고, 다른 프로젝트는 새로운 방향으로 수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기존 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애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부 구성원들과 달리 그런 결정들을 내리기 더 쉬우셨던 것 같다. 나는 이때 ‘피벗(Pivot)’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접했다.
‘피벗(pivot)’의 사전적인 의미는 ’회전한다‘는 것인데, 대개 스포츠에서는 ‘급격한 방향의 전환’을, 비즈니스에서는 진행 중인 전략을 과감하게 수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벤처기업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지만, 사실 바이오제약산업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신약개발은 초기 연구 단계부터 임상시험, 규제 승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애물과 높은 실패 가능성을 늘 마주하기 때문에 피벗은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고 성공 확률을 높이는 중요한 전략적 선택 중의 하나인 것이다.
2000년대 벤처 붐을 타고 생겨났던 많은 1세대 바이오 기업들 중에서는 화려한 시작과 달리, 끝내 사라지거나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회사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기술의 상업적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결과로 실패를 맞았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공적인 경영 기반을 다진 회사들도 있는데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적절한 시점에 피벗을 통해 사업 방향을 재조정하고 그로 인해 연구개발 및 사업의 성과를 잘 이루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연이은 기술수출로 한국의 대표 바이오기업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구 레고켐바이오)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리가켐은 내가 예전에 근무하던 회사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데다 같은 업계에 있다 보니 회사 경영진 분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가끔씩 있었다. 이 회사는 찾아온 손님에게 커피를 내어주는 종이컵부터 무척 인상적이었다. 창업자의 캐리커처와 그분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신약만이 살길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길로만 가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리가켐은 원래 창업당시에는 합성신약 개발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회사의 좌우명에서 느껴지는 고집과 달리 자신들이 해오던 것에만 얽매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학계의 전체적인 흐름과 시장의 요구를 면밀히 분석하다가 ‘항체약물접합체(ADC)’라는 새로운 기술에 주목하게 되었고 적절한 타이밍에 이 새로운 분야로 과감하게 회사의 연구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회사의 큰 성장을 이루어냈다.
피벗은 생명과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종종 피벗, 즉 방향전환과 재설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한다. 지금껏 쌓아온 것들이 물거품이 될까봐 아쉬워서, 혹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피벗이 필요한 순간들은 언제일까?
1. 커리어의 변화
처음 선택한 직업이 우리의 평생을 좌우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더 이상 성장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고, 혹은 자신 안에 숨어있던 새로운 열정과 관심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피벗이란 이럴 때 단순히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에서 어떻게 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피벗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찾는 전략적 전환이어야 한다.
2. 관계의 전환
때로는 인간관계에서도 피벗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관계가 더 이상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관계를 재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관계는 약간의 조정을 통해서 계속해서 유지하거나 더 깊어질 여지가 있는 반면, 또 다른 관계는 손절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차라리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의 계기를 찾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관계에서의 피벗은 더 건강하고 서로에게 더 나은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관계의 질과 방향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3. 삶의 목표 재정립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20대에 세웠던 목표가 30대나 40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여러 단계에서 자신의 목표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상황에 맞는 목표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때때로 과감히 피벗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젊을 때는 경제적 성공을 우선으로 삼았다면, 나이가 들면서 가족과의 시간, 건강, 그리고 내면의 만족감을 더 중시하게 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피벗은 그러한 전환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L박사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경로를 크게 바꾸었다. 연구원이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실험실에서만 지내던 나는, 박사님 덕분에 바이오제약산업에서 연구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 뜨게 되었다. 박사님이 보여주셨던 넓은 시야와 새로운 관점은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내 커리어와 삶의 방향을 피벗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L박사님께 살아생전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제대로 드릴 기회가 없었음이 못내 아쉽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2024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