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World Evidence (실사용증거)
<2005년 5월 15일>
“지난 월요일 새벽 2시에 길을 떠나 장장 11시간을 달려 인디애나폴리스에 도착했다. 맡은 프로젝트는 항암제 관련 마케팅 부문이다. 완전 미국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려니 힘도 들고 자칫 의기소침해지기 쉬운데, 지난 1년간의 학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대한 기 안 죽고 잘해 보련다. 어차피 힘든 거 각오하고, 그리고 그걸 기대하고 온 거였으니까. 최소한 영어라도 좀 더 늘어서 돌아가겠지.”
원래는 언젠가 박사과정에 진학해 계속 연구원으로 일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우연히 연구기획 업무에 발을 들여놓고난 후로는 경영과 관련된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제약/바이오 업계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MBA 진학을 결심할 때도 헬스케어 산업에 특화된 세부전공이 있는 학교들 위주로 지원했고, 운 좋게도 그중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와튼스쿨(The Wharton School)에 합격했다.
미국 생활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돈도 많이 들고, 잠은 부족하고, 영어도 어려웠으며, 가끔씩 은근한 인종차별까지 느끼다 보면 통장잔고뿐 아니라 자신감과 자존감의 잔고도 함께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2005년 여름, 나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미국의 2년짜리 MBA 과정 중간에는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이 인턴십을 통해 졸업 이후의 취업 기회를 모색한다. 나는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꼭 일해 보고 싶었고, 마침 다행히 일라이 릴리(Eli Lilly)의 본사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회사에는 인턴들이 수행할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다. 처음에 나는 DDS(Drug Delivery System) 관련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는데, 아무래도 내 전공분야를 고려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는 분야보다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변경을 회사에 건의했고, 항암제 개발 관련 프로젝트로 다시 배정받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프로젝트의 주제는 암 치료제 개발 시 회사가 만들어야 하는 '근거의 수준(level of evidence)'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나는 항암제 관련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 프로젝트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만도 무척 애를 먹었다. 인턴십 3개월의 첫 2주를 ‘도대체 날 보고 뭘 하라는 것인가’를 이해하는데 다 쓴 느낌이었다.
흔히 ’ 항암치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부작용이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극심한 설사와 함께 피부도 엉망이 되는 등의 모습.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투병하실 때, 항암치료를 받으시면서 머리가 빠지고 피부가 벗겨지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난다.
‘1세대 항암제’라고도 불리는 화학요법제(chemotherapy)는 빠르게 증식하는 세포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암세포가 빠르게 증식하는 성질 이용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 세포도 함께 공격당한다는 점이다. 특히 모발세포나 장점막세포, 피부세포처럼 빠르게 증식하는 정상세포가 손상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설사가 나며 피부가 벗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등장한 것이 ‘2세대 항암제’인 표적치료제(Targeted Therapy)이다. 표적치료제는 1세대 항암제와 달리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구분해 암세포만 골라서 공격하도록 설계되었다. 덕분에 부작용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다. '마법의 탄환’, ‘기적의 항암제’와 같은 별명을 얻으며 2001년에 출시된 만성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Gleevec, imatinib)이 표적항암제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2011년에 글로벌 제약회사 BMS가 개발한 여보이(Yervoy, ipilimumab)는 세계 최초의 면역항암제였다. '3세대 항암제'로도 불리는 면역항암제는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활성화시켜서 신체 스스로가 암과 싸우도록 만든다. 여보이(Yervoy) 이후에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많은 약물이 추가로 개발되면서 면역항암제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약물 역시 면역항암제 계열이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제약회사들은 ‘엔드포인트(endpoint)’라 불리는 목표를 설정해서 약물의 효과를 입증해야 한다. 이 endpoint는 임상시험 결과를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1. 전체 생존율(OS, Overall Survival): 환자가 약물을 투여받은 후 얼마나 오래 생존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으로, 항암제 효과의 가장 확실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를 얻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항암제의 효과가 좋을수록 환자들이 더 오래 생존하기 때문에 만약 OS만을 약물허가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버린다면, 효과가 좋은 약일수록 허가를 받는 데는 역설적으로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2. 무진행 생존율(PFS, Progression-Free Survival): 치료 중 또는 치료 후 암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유지되는 기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OS보다 빠르게 결과를 확인할 수 있지만, 환자의 실질적인 생명 연장여부를 확실히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3. 객관적 반응률(ORR, Objective Response Rate): 환자의 종양 크기가 줄어드는 비율을 측정한다. 약물의 치료 효과를 비교적 빠르게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반면, 장기적인 생존율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높지는 않다.
4. 삶의 질(QoL, Quality of Life): 환자의 일상생활의 질을 얼마나 개선하는가도 중요한 평가 지표가 될 수 있다. 만일 어떤 항암제가 생존기간을 늘려주지만, 환자는 그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게 된다면 그것이 반드시 좋은 약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항암제를 개발할 때는 이처럼 여러 가지 지표들 중에서 약물과 질병의 특성에 따라 적절한 엔드포인트를 설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얻은 자료, 혹은 근거(evidence)는 해당 신약이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허가를 받은 다음에라도 그 약이 실제로 얼마나 널리 쓰일 수 있을 것인지, 즉 약물의 상업적인 성공과 실패에까지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바로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결정 내릴 때 제약회사가 고려해야 하는 전략적인 접근법을 분석하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공들여서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거기에서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낸다고 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임상시험은 잘 짜인 환경에서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실을 100% 반영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상시험에서 좋은 효능을 보였거나 우수한 안전성을 입증했던 약물이, 막상 허가를 받은 후 많은 환자들에게 쓰이면서 기대했던 만큼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거나 예상보다 부작용이 심한 경우들도 있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Real-World Evidence (RWE, 실사용증거)'다. 이는 임상시험이 끝나고 이미 허가를 받아서 실제 환자들에게 사용되고 있는 약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효능과 안전성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얻는 데이터로, 신약의 '진짜' 효능과 안전성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RWE는 약이 허가를 받은 다음에, 의료보험을 적용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때 특히 중요하게 활용된다. 임상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하더라도, 약이 진짜 세상에 나와서 복잡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면서 나타내는 효능효과라야 그 약의 진정한 실력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어릴 때 우리는 학교에서 책과 교과서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선생님들은 정제된 이론과 완벽하게 짜여진 답들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 지식을 흡수하면서 세상을 준비했다고 믿는다. 졸업할 무렵,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제 필요한 건 다 배웠어. 세상에서 잘 해낼 일만 남았군.'
그러나 막상 사회에 발을 디디면, 그 믿음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금세 깨닫게 된다. 세상은 교과서처럼 깔끔하지 않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 복잡한 상황들이 우리 앞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때야 우리는 머리로 배운 것과 실제로 몸으로 부딪히는 것의 차이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런 깨달음은 종종 좌절감으로 이어지지만, 중요한 건 그 좌절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배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부딪히고, 실패하고, 때로는 넘어지면서 얻는 교훈들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자산이다.
그래서 성적표나 졸업장의 타이틀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일하고 관찰해본 끝에 내린 결론도 같다. 책에서 배운 것은 그저 출발점에 불과하다. 실제 세상에서 부딪히며 얻은 경험만이 진짜 실력을 만든다.
2005년 여름, 나의 인턴 경험은 단순히 암 치료제 개발의 복잡한 과정만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책이나 교과서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현실에서 부딪히며 얻게 된 배움의 중요성을 한번 더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유학 첫해에 느꼈던 좌절과 의구심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음도 깨달았다. 그 인턴십은 단지 경력의 한 줄을 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다시 찾게 해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024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