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ics & Compliance (윤리 및 준법감시)
<2006년 8월 19일>
"8월 7일부터 Indianapolis에 있는 본사에 와서 영업교육을 받고 있다. 시험도 치고, 제품교육과 sales skills을 비롯해서 각종 관련 규정과 절차 등도 배우고 있다. 롤플레이와 비디오 녹화도 많이 하고... 전체적으로 일정이 많이 빡빡하게 짜여져 있어 잠이 다소 부족하고 입술이 부르틀 만큼 피곤한 지경이다."
인턴십을 마치고 나서 정규직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조건이 한 가지 있었다. 내가 원했던, 본사에서의 마케팅이나 전략 관련 업무를 맡기 전에, 먼저 현장에서 영업사원으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이 됐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좀 겁도 났었기 때문이다. 영업이라니? 게다가 영어로? 하지만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그것도 미국 본사에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긴 아까웠다. 그래서 제안을 수락했다.
나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북부지역의 내분비/비뇨기과 영업팀에 배치되었다. 내가 담당했던 지역의 절반은 부유층이 사는 교외 지역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빈곤층이 밀집한, 주로 흑인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였다. 미국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1년 동안 치열한 영업의 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돌이켜보면 힘든 일이나 사건사고도 많았다. 길바닥에서 총알 탄피를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한 적도 있고,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의 창문이 깨진 채 안에 있던 제품 샘플과 물품들을 전부 도난당해서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치안이 좋지 않은 미국 사회의 현실에 제대로 신고식을 치른 느낌이었다.
미국에서 직접 영업을 경험해 본 덕분인지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등장하면 자연스레 유심히 보게 된다. 특히 2010년에 개봉했던 영화 <러브 앤 드럭스(원제: Love and Other Drugs)>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al)과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가 나와서 재미있게 봤다.
극 중에서 제이크는 화이자(Pfizer)의 비아그라 담당 영업사원으로 나온다. 영화 속에 그려진 미국 제약 영업현장의 모습들 중에서 의사와의 짧은 만남을 위해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리던 장면이나, 병원 샘플 창고에서 경쟁사 제품보다 내가 담당하는 제품을 더 잘 보이게 배치하려고 애쓰던 모습 등은 내가 실제로 겪었던 것과 너무 비슷해서 무척 흥미로웠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다소 과장되거나 믿기 힘든 장면들도 꽤 있었다.
<러브 앤 드럭스>에서는 과거 제약회사의 영업관행을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에 곁들여서 그나마 가볍게 보여주는 편이다. 하지만 보다 적나라하고 심각하게 이 문제를 파헤친 영화와 드라마들도 많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 사회에서 마약 중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이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Painkiller(페인킬러)>라는 드라마는 마약성 진통제 오남용의 심각성을 조명한, 실화에 기반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라서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이 드라마의 중심에 있는 문제의 회사 퍼듀파마(Purdue Pharma)는 제약회사가 사명감보다 탐욕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는 코네티컷주에 있던 이 회사의 본사를 현장 실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했던 적도 있는지라, 나중에 그 회사가 일으킨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소름이 돋는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제약회사의 어두운 모습들은, 불행하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보다는 수익을 최우선시해서 큰 문제를 일으킨 많은 제약회사들이 그 결과로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제약업계는 미국 내에서 대중의 신뢰를 크게 잃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Gallup)은 매년 여러 가지 산업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신뢰도를 조사해서 순위를 발표하는데 제약산업은 부끄럽게도 거의 항상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약업계 내부와 외부에서 그동안 많은 조치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2010년에 발효된 "Sunshine Act"다. 이 법안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제약회사가 의사나 의료기관에 제공하는 모든 금전적 혜택을, 그것이 설령 커피 한잔이라 할지라도, 모두 '해 아래에 투명하게‘ 낱낱이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Open Payments"라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누구나 이러한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K-Sunshine Act"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제도가 입안되어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약업계 내부에서도 많은 자정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많은 제약회사는 "Ethics and Compliance Officer"와 같은 윤리 및 준법감시 책임자를 사내에 임명하고, 또 이와 관련된 제도나 조직들을 세밀하게 설계함으로써 회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활동들의 윤리성 및 준법성 여부를 철저하게 관리감독하려고 애쓰고 있다. 실제로 내가 일했던 회사들에서는 Compliance 위반사례를 항상 매우 심각하게 다루었고, 내용에 따라서는 즉각적인 해고사유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규정과 제도가 있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심심찮게 일부 제약회사들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포장해 놓고, 속으로는 법망을 피해 온갖 불법을 저지르다가 단속에 걸리는 것을 보곤 한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제약회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법과 규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잘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법과 규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거나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법과 규정이 아니라 사람이란 얘기다.
얼마 전에는 <빈센조>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악당은 결국 제약회사 대표라는 설정을 알게 되고 나서 다소 허탈하게 웃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영화 <부산행>에서도 제약회사가 몹쓸 좀비바이러스를 만들었고, <미션 임파서블 2>에서는 한 제약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퍼뜨린 다음, 그것의 치료제를 판매해서 떼돈을 벌고자 했던 음모가 파헤쳐진다.
최근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슈퍼히어로 관련 미국드라마를 몰입해서 함께 보다가, 마침내 밝혀진 거대악의 궁극적인 정체가 제약회사였다는 것을 알고서 황당했었다. 그들이 이루려고 했던 것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초능력을 가질 수 있게끔 해주는 약‘을 파는 제약회사였던 것이다. 뜬금없이 제약회사가 나쁜 놈이라는 설정으로 소환되는 바람에 아들은 재미있다며 빵 터져서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아니, 왜 맨날 빌런(villain, 악당)은 제약회사인 거야?"
사실 바이오제약업계에 몸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직업도 직업이지만, 생명을 구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특정 제약회사의 불법이나 부도덕한 행위가 도마에 오르거나, 제약회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쁜 놈들 집단으로 매도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살짝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적어도 나는 부끄럽지 않게 일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한 사람부터라도 잘하는 것이니까.
(2024년 10월)
*Cover image: Photo by Etactics Inc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