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ient Journey Map (환자의 여정 지도)
<2007년 12월 28일>
"연말에 독일과 프랑스에 출장을 다녀왔다. 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고 인맥도 넓히는 등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었다... 본사에 앉아 각 나라 지사의 마케팅 전략을 받아서 읽을 때는 공허하게 지나치던 말들이, 직접 와서 사람들의 표정, 억양, 체취를 느끼며 토의를 하다 보니 생생한 살아 있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영업현장의 고달픔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을 무렵,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글로벌 마케팅 팀으로 출근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글로벌 제약회사의 본사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내게 주어진 역할에는 'International Brand Leader'라는 꽤 거창한 이름이 붙어있었다. 내가 맡은 품목의 글로벌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세계 각국의 지사에서 현지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또한 계획대로 전략이 실행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출장을 다니며 적절한 조언과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일도 내 책임이었다.
이 새로운 업무는 너무나 흥미로웠다. 나는 3년 가까운 시간의 절반 이상을 유럽으로, 아시아로, 남미로 쉴 새 없이 출장을 다녔다. 현장에서 직원들과 직접 토론하고 고객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본사 사무실에 앉아서 읽을 때는 아무 감흥이 없던 그저 글자들만 가득한 문서에 불과했던 내용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직함에 걸맞게 동료들을 '리드(lead)' 하기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모든 것이 새로워서 어리버리하는 나와 달리, 각국의 담당자들은 다들 관록의 베테랑들이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오히려 훨씬 많았다. 그때 나에게 유일하게 넘쳤던 것은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열심히 배우려는 열정뿐이었다.
글로벌 마케팅 팀에서 일하면서 배웠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제품의 비전과 실행계획에 관한 체계적인 전략인 브랜드 플랜(Brand Plan)을 수립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Patient Journey Map'이라는 것이 있다.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할 때, 제약회사는 본격적인 출시를 앞두고 많은 준비작업을 한다. 이를 'Launch Readiness' 라고 한다. 다양한 부서가 ‘제품 출시 24개월 전에 미리 해야 할 일’, ‘18개월 전에 해야 할 일’ 등에서부터 ‘출시 직후에 해야 할 일’들까지 촘촘하게 시간표를 정해놓고, 계획을 다 함께 차근차근 실행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Patient Journey Map을 작성하는 것이다. 이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환자들이 질병을 앓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진단과 치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문서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A라는 희귀 질환을 앓는 환자가 있다면, 처음에는 단순한 증상으로 시작될 수 있다. ’이게 뭐지? 왜 이러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을 찾게 된다. 가까운 동네 의원으로 가는 환자도 있고, 처음부터 전문의를 찾는 사람도 있다. 이 과정에서 받는 검사나 진단은 환자가 선택한 경로에 따라 달라진다. 때로는 오진으로 잘못된 치료를 받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진단 방랑'에 빠져 고통 속에서 맴돌기도 한다.
이처럼 환자가 겪는 모든 과정과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결과들을 빠짐없이 세세하게 분석한 후, 이를 하나의 지도처럼 시각화해서 담아낸 문서가 Patient Journey Map이다. 그리고 이 Map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회사가 실행하고자 하는 모든 전략적인 의사결정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
Patient Journey Map이 완성되었다면, 이제 회사는 그것을 펼쳐놓고서 다음 단계의 작업을 해야 한다. 바로 ‘레버리지 포인트(Leverage Point)’들을 찾는 일이다. 레버리지 포인트란 환자의 복잡한 여정 가운데 ‘이 지점을 이렇게 바꿀 수만 있다면 환자의 최종 결과가 더 나아질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되는 지점들을 말한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다로운 질환이라면 의료진이 적절한 검사방법들을 잘 선택해서 오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혹은 ’A, B, C와 같은 증세가 있으면 이러이러한 질환을 의심해 볼 수 있다‘거나 혹은 ’어떤 전문과를 찾는 것이 좋다‘는 지식을 환자가 평소에 좀 갖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치료 도중에 생길 수 있는 특정 부작용을 환자가 잘 관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혹은 환자가 약을 지시받은 대로 제대로 복용하는 것이 무척 까다로워서 이것을 누군가가 잘 도와주는 것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이런 지점들 하나하나가 모두 잠재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다.
하나의 Patient Journey 안에는 여러 개의 레버리지 포인트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질병마다 다르고 나라 마다도 다 다르기 때문에, 노련한 마케터일수록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의료환경과 자신이 담당한 질환에 대해 깊이 있게 잘 이해하고 있고 이로 인해 남들보다 더 예리하게 Leverage Point들을 잘 발굴해 낼 수 있다.
2.
여러 개의 Leverage Point들을 선정하고 나면, 이제는 이것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다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두 가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첫째는 실행 난이도다. 각각의 지점을 개선하는 것이 회사의 능력에 비추어 얼마나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를 생각해 본다. 두 번째는 결과의 중요도이다. 각각의 지점이 개선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얼마나 큰지 작은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회사가 비교적 쉽게 개입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 결과는 크고 중요하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를 높게 둬야 한다. 반면에 회사가 개입하기에는 너무 많은 노력이 들지만 그에 비해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미미한 편이라면 그것은 우선순위를 대폭 낮춰야 한다.
3.
이런 일련의 분석과정을 토대로 회사가 전략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들을 최종 결정한다. 이를 ‘Strategic Imperative (SI)’라고 부른다. SI가 정해지고 나면 그때부터 회사의 여러 부서들은 정해진 SI를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인 활동계획들을 세운다. 그리고 경영진은 각 부서의 활동계획이 전체 SI와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해당 계획들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지 등을 결정한다.
브랜드 전략 수립 과정에서 환자의 여정을 철저히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전략과 실행 계획을 도출하는 방법론은 사실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조언은 결코 따르기 쉬운 충고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여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다양한 경로들이 우리 앞에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떻게 '레버리지(leverage)'를 발휘할 수 있을지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야 할지, 어떤 부분을 변화시키거나 주목하면 우리 인생 전반이 더 나아질지에 관한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브랜드 전략수립 과정에서 레버리지 포인트들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처럼, 인생에서도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특히 무엇이 우리 손안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해 보이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감하게 우선순위를 낮추고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방향성 없이 그저 떠돌듯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너무 목적지향적인 삶은 피곤하다며,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 역시 인생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방향성과 통제력을 갖고 싶다. 그래서 나에게 더 중요하고 내 능력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이 쏟고 싶다.
인생의 여정은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여정 속에서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배우고 성장해 가느냐라고 생각한다.
(2024년 10월)
Cover image: Photo by amjd rdw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