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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Sep 21. 2024

'성공적인 변화'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Orphan Drug (희귀질환치료제)

<2004년 7월 4일>

“안녕하세요. 저는 CMD (Craniometaphyseal Dysplasia) 환아 엄마입니다. 아이는 5살 사내아이 OOO입니다. 인터넷을 두드리면 아이의 질환에 대해 이것저것 나오는데 영어를 잘 못하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답답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우연히 ‘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라는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단체는 희귀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방면에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희귀 질환은 치료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제대로 된 연구조차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환자와 그 가족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절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가끔 내가 모임에라도 참석하면, 환자나 그 가족분들은 내가 제약회사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가와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시기도 했다.


그분들의 간절한 눈빛 속에서,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바램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럴 때면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내가 그분들께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약간의 의약학 지식과 어학 능력을 활용해 해외 자료를 찾아 번역해 드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어린 환자의 부모님들로부터 감사의 메일이나 쪽지를 받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한편으로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묘한 아쉬움과 불편함이 자리 잡곤 했다.



희귀 질환과 Orphan Drug


연구소에서 연구기획 업무를 맡고 나서부터, 나는 글로벌 제약산업의 R&D 동향을 주기적으로 분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점은 대부분의 글로벌 제약사들이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소화기 질환 같은 대중적인 질병 치료제에 대부분의 연구자원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자 수가 많을수록 기대 매출이 높아지고, 제약회사도 결국 기업이다 보니 경제 논리가 사업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희귀 질환은 말 그대로 ‘희귀한’, 즉 환자의 숫자가 적은 질환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환자 수가 2만 명 이하일 경우 희귀 질환으로 분류되며, 미국에서는 20만 명 이하인 질환을 희귀 질환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희귀 질환의 수는 약 7,000가지가 넘는데 그중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환자가 몇 명밖에 안 되는 극히 드문 질환들은 ‘극희귀’ 또는 ‘초희귀(ultra-rare) 질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알려진 수많은 희귀 질환 중에 치료제가 개발된 것은 겨우 5%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희귀 질환에 걸릴 경우, 거의 95%의 확률로 그들을 도울 치료제가 딱히 없다는 뜻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귀 질환은 환자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래서 마치 돌봐주는 부모가 없는 고아(orphan)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뜻에서 ‘Orphan disease’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희귀 질환 치료제 역시 ’Orphan drug’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내가 연구원으로 일하던 당시와 비교했을 때, 사실 지금은 상황이 무척 달라져있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 새롭게 허가받는 신약의 절반 이상이 희귀 질환 치료제일 정도로 이제는 많은 제약사들이 이 분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웬만한 글로벌 제약사들은 별도의 희귀 질환 사업부를 두고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는 추세다. ‘Orphan drug'이라는 명칭이 무색해 질 정도다. 과거 ‘고아’ 취급을 받던 희귀 질환 치료제들이 이제는 글로벌 제약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하다.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시작점은 1983년 미국에서 제정된 ‘Orphan Drug Act(희귀의약품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은 제약사들이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세금 감면, 연구비 지원, 허가 절차 간소화, 그리고 장기간의 독점권 부여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한국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면서, 많은 회사들이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 수 있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제 희귀 질환 치료제는 더 이상 관심 밖의 영역이 아니다. 과거에는 환자가 적어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받았지만 이제는 생명공학의 발전과 정책적 지원 덕분에 더 많은 빛을 보고 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희귀 의약품에서 배우는 인생 교훈


1. 변화는 강요하기보다 유도하는 편이 낫다

희귀의약품법(Orphan Drug Act)이 통과되기 전까지 제약사들은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법으로 인해 다양한 혜택이 제공되자 기업들은 서서히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 법이 시행된 이후로 수많은 희귀 질환 치료제가 개발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변화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그 첫걸음을 내딛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럴 때는 규제나 강제적인 방식으로 무턱대고 변화를 “강요”하는 대신,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자발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를 ’넛지(nudge)’라고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강력한 규제나 강제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때도 있다. 특히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한 심각한 사회문제 등에 대해서는 강력한 법적제재나 처벌을 통한 강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점진적이고 “지속가능한 변화”를 만들기 원한다면 자발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함께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하다.


2. 변화는 시간이 걸린다

희귀 의약품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이 곧바로 급증한 것은 아니었다. 제도가 마련되고 나서 실제로 이러한 변화가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희귀 질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했고, 기업들도 이 새로운 시장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법적, 경제적 인센티브가 작동하고, 생명과학기술의 발전이 더해짐에 따라 결국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인생에서도 변화는 대개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목표나 결심을 세우면 보통 그 결과를 당장 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성공적인 변화는 꾸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 운동, 학습, 커리어 전환, 혹은 삶의 습관을 바꾸는 일 등, 어떤 것이든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작은 변화를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 큰 변화를 만드는 비결이다. 성급함과 조급함이 변화를 성공적으로 앞당겨주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3.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희귀 의약품 개발이 예전에 비해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희귀 질환 치료제는 높은 연구개발비에 비해 환자수가 적기 때문에, 이는 제약사 입장에서 가격을 높게 책정하려는 요인이 된다.  이로 인해 막상 치료제는 개발되었지만 정작 환자들이 약을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이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는 것은 우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한 단계 성장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성공에 목매거나 안주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나아가고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려운 도전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내가 MBA 진학을 결심했을 때, 입학지원을 위해 작성해야 하는 에세이(essay) 주제 중에는 ‘학위를 따고 나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거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제약회사들이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에 보다 많이 관심을 기울이도록 변화를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제약업계는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이미 많이 변해 있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요즘, 이미 개발된 희귀 질환치료제를 환자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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