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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Aug 24. 2024

우아하게 실패하는 법

약물 재창출 (Drug Repurposing)

<1996년 10월 17일>

"동물실험결과가 다행스럽게도 뭔가가 있다. TG가 4주, 6주, 8주 투여군에서 모두 차이가 날 뿐 아니라, ALP도 6주, 8주 투여군에서 차이를 보인다. 8주 투여군 GOT, GPT 내일 측정하고 6주, 8주 투여군 ALDH, Glutathione을 측정하고 나서 실험을 정리해야겠다."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할 때였다. 실험실에서 매일매일 뭔가 열심히 하긴 했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잘 나오지 않았다. 약물을 투여하고 4주 내지 8주에 걸쳐서 효과를 보는 실험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번 실패할 때마다 조건을 바꿔서 다시 준비하고 새로 결과를 볼 수 있을 때까지 2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매번 실험을 재개할 때마다 '제발 이번에는 잘 되기를...' 하고 빌었다.


졸업하려면 논문을 써야 하는데, 그리고 논문을 제출해야 할 날짜는 재깍재깍 다가오는데, 실험결과는 뜻대로 나오지 않으니 시간이 갈수록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거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실험에서 마침내 기다리던 결과를 받아 들었다. 먹구름 사이에서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신약개발은 실패가 기본


졸업 후에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신약 개발은 실패가 기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너무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이 최종적으로 약으로 개발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0.01%~0.02% 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약을 개발하는데 중요한 것은 실패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가급적 빨리 하는 것이다. 특히 신약개발에 드는 비용은 초기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실패를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비용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 실패로부터 조금이라도 아이디어를 얻어서 재빨리 다음 시도에 나설 때 성공에 이를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인생도 신약 개발 과정과 비슷하다. 아무런 실패 없이 항상 성공만 하기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실패’는 성가시지만 가끔씩 보는 친구 혹은 멘토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꼴 보기 싫거나 귀찮게도 느껴지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친구다. 그러니 어쩌다가 실패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잠시 들어오라고 해서 커피 한 잔을 내어주며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다. 다만 너무 오래 머물지 않도록 적당히 있다가 보내야 한다. "고마워, 실패야. 이번에도 너한테 또 새로운 걸 배웠네. 그런데 미안하지만 너무 자주 찾아오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난 네가 좀 불편하거든.“



약물 재창출 (Drug Repurposing)


요즘 비만치료제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삭센다’라는 이름으로 처음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것보다 효과가 훨씬 더 뛰어난 약들이 개발되어서 천문학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들 약을 개발한 두 제약회사 일라이릴리(Eli Lilly)와 노보노디스크(Novo Nordisk)는 덕분에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기업가치가 높은 제약회사들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들이 개발한 비만치료제의 시초는 원래 실패한 당뇨치료제였다. Lilly에서 ‘바이에타(Byetta)'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작용기전(GLP-1 agonist)을 가진 당뇨치료제를 개발했는데, 이 약을 투여받은 환자들은 대부분이 속이 심하게 울렁거리거나 구토가 나서 약을 중단하기 일쑤였다. 결국 당뇨치료제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릴리에 근무하면서 영업팀이 고전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대신에 속이 울렁거리는 부작용이 식욕을 억제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실제로 이 약을 처방받은 환자들의 체중이 감소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이런 계열의 약물을 당뇨치료제가 아닌 비만치료제로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제약산업에서는 이를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혁명적인 약 ‘비아그라’도 약물 재창출의 유명한 사례이다. 비아그라는 애당초 고혈압 치료제로 개발되었지만 고혈압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반면에 엉뚱한(?) 부작용에 주목하면서 세계최초의 발기부전 치료제로 개발되어 역사에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실패로 보였던 약물이 다른 질병에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는 것처럼, 인생에서도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가장 큰 성공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실패를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고 ‘끝장나는 것’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성장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변화를 위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기대한 대로 되지 않더라도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번에 ‘실패’라는 친구가 또 찾아오면, 이번에도 피하지 말고 잠시 맞아주자. ‘실패’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다만 약간 성가신 손님일 뿐이며, 잘 대접하고 나면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친구다. 우아하게 실패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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