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시선이 만드는 거리와 온도
몸에 좀 불편한 곳이 있어서 회사 근처에서 간단한 병원 진료를 받았다. 며칠 약을 먹어야 한다기에 처방전을 받아 들고 약국으로 가다가 잠깐 멈칫했다. 건물의 통로에만 약국이 셋이나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새도 없이 세 약국 중 한 곳의 약사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분은 별다른 몸짓은 없었지만, 간절한 눈빛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내 발걸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으나 나는 방향을 바꿔 자연스럽게 그 약국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눈이 맞는다는 건, 어쩌면 아주 작고 일상적인 마법이다. 특별한 말도, 손짓도 없이 마음이 움직이는 그 찰나의 교감. 단지 사람의 시선 하나에 발걸음이 방향을 바꾼다는 건,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더 가까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자주 다니던 대학병원의 약국들이 생각난다. 병원 건너편에 약국 여러 개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약국 입구에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들이 건널목을 건너오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인사는 요란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일단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면 다른 약국으로 들어가기가 조금은 어려웠을 것 같다. 눈인사를 나누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모르는 타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관계의 문턱을 넘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다른 약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작은 배신처럼 느껴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눈 맞춤이지만, 그 안에 담긴 관심과 기대가 우리를 ‘예의상’ 혹은 ‘인간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눈이 맞는다’는 건, 단지 연인(戀人)의 언어만은 아니다. 오히려 ‘눈 맞춤’이라는 아주 작고도 일상적인 행동은 조직 내에서 사람의 심리, 관계, 자신감, 신뢰도까지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으면, 어떤 이들과는 자연스럽게 눈이 맞고, 어떤 이들과는 묘하게 시선이 비껴가는 경우가 있다. 눈이 잘 맞는 이들은 대개 업무상 큰 문제가 없거나, 자신의 말과 생각에 확신이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눈 맞춤을 피하는 듯한 이들은 업무에 대한 불안, 관계에서의 거리, 혹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회의 중에 눈이 자주 마주치는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더 하게 되고, 눈을 피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되곤 한다. 말보다 먼저, 눈이 조직 안에서 관계의 방향성을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모든 눈 맞춤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거나 신뢰를 쌓아주는 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눈 맞춤은 상대가 나에게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일 때는 효과적인 소통의 수단이 되지만, 이미 의견이 갈리거나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저항감을 키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는 행위가 위협적이거나 지배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을 맞춘다고 해서 무조건 설득이 쉬워지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눈 맞춤도 상황을 보고 조절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점점 더 배우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일부러라도 사람들에게 먼저 시선을 맞춰보려 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때에도, 말이 막힐 때에도... 간혹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어색함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낄 때도 있다. 그리고 상대가 눈을 피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고 그저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것 — 그것도 내가 배워가는 감정의 기술 중 하나다.
사람은 결국 이성으로 생각하고, 감정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눈 맞춤이 통할지 아닐지는 상황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나는 먼저 시선을 건네는 쪽에 서보는 걸 선택하려고 한다.
눈 맞춤은 가능성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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