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예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A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었는데 갑자기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좀 되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니 A는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A와의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빙 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누군가를 소개해 달라는 것인지, 단순히 조언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위로를 얻고 싶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괜히 그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들을 꼰대처럼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좀 이야기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A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있었던 가슴 아픈 일이 떠올랐다. 몇 년 전, 내가 대전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역시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예전 동료이자 부하직원이었던 B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가 몇 년 만에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B는 내 안부를 묻더니 나를 만나러 대전에 한번 내려오겠다고 했다. 내가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어차피 회사일 때문에 지나가는 길이라고 했고, 그래서 나도 그러라고 했다.
몇 년 만에 만난 B는 특유의 쾌활한 모습 그대로였다. 약간의 허세 섞인 유쾌한 말투도 여전했다. 자신이 새로운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주는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B가 새 회사에서 나름 자리를 잘 잡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단하다'며 추켜세워주고 축하해 주기까지 했었다.
B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무심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예전에 태진님과 같이 일했던 시절이 참 좋았어요. 혹시 기회가 되면 다시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 말이, 그저 사람 좋은 B가 내뱉는 특유의 덕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우리 회사에 잘 맞을 만한 자리가 생기면, 그때 내가 꼭 연락하겠다'라고 화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B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어려운 상황 때문에 해서는 안될 선택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충격에 빠져있었다. 나는 그가 대전까지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지를 계속해서 상상했다. 그리고 행여나 내가 그에게 부지불식간에 실망감을 더해주었던 것은 아닌지, 그때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를 자꾸만 복기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번 만남에서 내가 A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무엇을 놓친 것은 아닐까, 자꾸만 복기하게 되는데 그 복기의 끝에는 어느새 과거의 나 자신이 서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반대편에 있었던 시기가 몇 번 있었다. 힘든 시절, 누군가를 찾아가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용기를 내어 만남까지는 이끌었지만 정작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로 둘러대다가 결국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잊고 돌아섰던 날들.
그때 내 처지나 생각을 솔직하게 꺼내지 못했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자존심이 상할까봐 망설였던 때도 있었고, 상대의 말에 상처받을까 지레 겁을 냈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나타나주길 조용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는 방식은 참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하다. 때로는 너무 조심스럽고, 때로는 너무 두리뭉실하고 우회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절박해서 오히려 진심이 흐려질 때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책임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떠올리고, 찾아오고, 말을 건네려 애썼다는 그 사실 앞에서는 조금 더 겸허하고 조금 더 세심한 정성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여리다. 그리고 우리의 처지나 입장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어떤 날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고 싶어하지만, 또 어떤 날엔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순환을 기억하는 마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A에게 잘 지내는지 내가 먼저, 다시 한번 연락해 보아야겠다.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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