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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없다고 눈치 보면 안 되는 이유

AI, 직원, 그리고 아내

by 함태진

주말 오후, 마음먹고 집 청소를 하려던 참이었다. 이왕이면 경쾌한 음악을 들으면서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유튜브 앱을 열었다. 그리고 검색창에 “청”이라는 한 글자를 치자마자, 이게 웬일인가? 추천 검색어로 “청소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이 맨 위에 뜨는 것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뭐지? 이거 설마, 내 마음을 읽은 건가?’


그리곤 ‘AI가 눈치가 무척 빠르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건, 정확히 말하면 ‘눈치가 빠르다‘기보다는, 가능성을 잘 예측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AI, 특히 유튜브 같은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누구의 기분이나 표정을 보는 것도 아니고, 눈빛을 읽지도 않는다. 대신 수많은 사용자의 데이터, 즉 ‘주말 오후’, ‘청’이라는 단어 첫 글자, 그리고 비슷한 시간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찾는지에 대한 통계를 바탕으로 가장 가능성 높은 결과를 추천할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말에 ‘청소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을 틀고 청소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


원리야 어찌 되었건, 그 정교한 예측이 내가 바라던 걸 정확히 맞췄으니 놀랍기도 하고, ‘눈치 빠른 AI’가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치가 빠른 것 vs. 눈치를 보는 것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눈치 빠른 직원”이 돋보일 때가 많다. 상사가 말을 아끼고 있을 때도 필요한 걸 미리 준비해 놓고, 상대의 말투, 표정, 말의 속도, 심지어는 침묵 사이에 숨어 있는 의도를 읽고 조용히 상황을 정리해 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종종 “센스 있다”, “같이 일하면 편하다”, 그리고 “믿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눈치 빠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서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는 건 곤란하다.


겉으로 보기엔 눈치 빠른 사람이나 눈치를 보는 사람이나 둘 다 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행동 방향은 정반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상황을 읽고, 스스로 판단해 능동적으로 상황을 리드한다.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조율자 역할을 할 줄 안다.

상대를 배려하되, 자기중심이 무너지지 않는다.

편안하고 믿음직하다.


반면, 눈치를 보는 사람은,

상황을 살피지만, 확신이 없어 행동을 유보하고 상황에 수동적으로 끌려간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멈추고, 결정권과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긴다.

자신의 판단보다 타인의 평가에 더 신경을 쓴다.

불안하고 자신감 없어 보인다.


상사의 입장에서 보면, 눈치 빠른 직원은 ‘말하지 않아도 내 의도를 이해하고 움직여주는 사람’이지만, 눈치를 보는 직원은 ‘매번 확인해줘야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그리고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신뢰의 격차로 이어진다.



눈치와 한국 문화


사실 생각해 보면 ‘눈치’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한국적이다. 내가 아는 한, 영어에는 이 말을 정확히 옮길 단어가 없다. ‘sensitive’, ‘perceptive’, 'social sense' 같은 단어들이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한국어의 ‘눈치’처럼 관계 속에서 미묘한 분위기와 감정의 흐름을 읽고,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하는 개념까지 포함하는 단어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아마도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집단 중심의 사회, 높은 맥락(high-context) 문화였다. 말보다 눈빛이나 기색,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암시와 조율이 중요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눈치는 생존의 기술이자, 관계의 윤활유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사람,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하는 사람, 상대의 감정을 먼저 읽고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 “센스 있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물론 최근에는 비즈니스가 점점 더 글로벌화되면서, 낮은 맥락(low-context)의 서구 문화, 즉 직접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더 중요한 문화가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unsplash.com/@kristelhayes



눈치가 없지만, 눈치도 보지 않는 사람


아내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눈치가 빠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눈치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당당하다.


언젠가 한 번은 운전 중에 음료수 병을 집어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으며, “빨대 없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아내는 태연하게 “응, 있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끝. 나는 당연히 내 질문에 맞춰 빨대를 꺼내 꽂아줄 줄 알았지만,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다시 물었다.
“아니, 빨대 있다며?”
“응, 있어. 왜?”
“그렇게 물어보면 빨대를 좀 꽂아줘야지.”
“아~ 그런 뜻이었어? 말을 해야 알지.”


기가 막혔다. 아내는 눈치가 정말 없다. 그렇다고 전혀 내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내가 좋다.




우리는 가끔은 눈치를 보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눈치 빠르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감각도 균형 있게 갖출 필요가 있다.


직장에서는...

눈치를 키우되, 눈치를 보지는 말자. 읽고, 파악하고, 이해하되, 내 판단과 목소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집에서는...

가족들이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주자.


(2025년 3월)



Cover Image: unsplash.com/@hanielespinal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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