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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서 벌어진 충격 반전

왜 스콧은 죽고 아문센은 살았나

by 함태진

1.

100여 년 전, 세상은 두 탐험가의 경쟁에 열광했다. 영국의 로버트 스콧과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 이 두 사람이 인류 누구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미지의 땅, 남극점을 먼저 밟기 위한 레이스를 펼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콧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겼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모터썰매, 조랑말, 개썰매 등 각종 운송수단을 동원한 그의 준비는 치밀했고 화려했다. 영국의 자존심이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에 비해 아문센은 변방 출신이었고, 그의 탐험대는 적은 후원에 의지해서 상대적으로 초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싸움은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뒤집어졌다.


1911년 10월 19일, 남극을 향한 긴 행군을 시작한 아문센과 그의 대원들은 1911년 12월 14일, 마침내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 스콧의 탐험대보다 약 한 달이나 빨랐다. 그리고 아문센은 남극점에 노르웨이의 깃발을 꽂고, 대원 전원과 함께 무사히 귀환했다.


1912년 1월 18일, 스콧의 탐험대도 마침내 남극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문센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스콧과 그의 대원들은 실망한 채 귀환길에 올라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의 모터썰매는 고장 났고, 조랑말도 차례로 쓰러졌다. 결국 대원들이 직접 무거운 썰매를 끌며 혹독한 대륙을 가로질러야 했고, 기아와 체력 저하, 끝없는 폭풍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그들은 불행하게도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대원 전원이 남극의 얼음 위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2.

짐 콜린스는 훗날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경영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Great by Choice』에서 “20 Miles March (20마일 행군)”라는 경영철학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아문센은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무리하지 않으며, 날씨가 아무리 나빠도 멈추지 않고 매일 20마일씩, 일정하게 나아간다는 원칙을 지켰다.


반면, 스콧의 탐험대는 날씨가 좋을 때는 더 많이 이동하고, 기상상태가 나쁠 때는 이동을 거의 멈추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등 불규칙한 행군을 펼쳤다.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전략의 차이가 결국 극적인 결과의 차이를 만든 것이라고 짐 콜린스는 해석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환경이 좋을 때라 하더라도 무리하지 않고, 반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정한 규율을 지키며 꾸준히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인 성취를 만드는 힘이라는 것이다.


francesco-ungaro-2qg8FKBXup0-unsplash.jpg https://unsplash.com/@francesco_ungaro


3.

지난 1년 반 동안,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해오고 있다. 직원도, 사무실도,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다국적 기업의 한국 지사를 세우는 일이다.


사업자 등록을 내고, 은행 계좌를 열고, 사무실을 계약하는 소소한 일에서부터 직원들을 뽑고, 시스템을 만들며, 사업의 기반을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일들을 하고 있다. 내 돈이 안 들어갔을 뿐, 창업자 같은 심정으로 회사를 정성스레 세워가고 있다.


다행히 이제는 제법 여러 부서가 생겨서 각자의 역할을 잘들 해주고 있고, 개인이 아닌 여러 부서와 팀이 함께 일하면서 성과를 내는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막막함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멀리 있는 목표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 빨리 성장하고 싶고, 시장에서 더 빨리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다.


이런 나를 보고, 얼마 전에 한 지인이 "20 마일 행군“을 상기시켜 줬다. 장기적인 목표와 비전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멀리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 밑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매일의 보폭을 꾸준히 지켜가는 것이라고.


덕분에 리더십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리더는 조직을 ‘빨리’ 가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멀리’ 그리고 ‘함께’ 가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외부 환경이 호의적일 때 과속하지 않고, 어려움이 닥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하는 것, 그 꾸준한 리듬을 지켜내는 끈기와 고집이 결국 조직을 지탱한다.



4.

생각해 보면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급해하며 빨리 가려다 보면 오히려 소중한 것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화려한 성공도, 극적인 성취도 물론 값지다. 하지만 그것을 좇으며 무리하는 사이, 정작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결국 진짜 의미 있는 여정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동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25년 9월)



Cover Photo: unsplash.com/@francesco_ung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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