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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

친구의 Z세대 아들과 나눈 성장의 대화

by 함태진

일요일 오전, 시내의 한 한산한 커피숍에서 P군을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모 방송사의 기자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뗀 청년. 그는 얼마 전 졸업 30주년 기념식에서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의 아들이자, 내 딸과 동갑내기이기도 하다.


그의 부모는 평생을 전문직에 몸담으며 이른바 '모범생의 궤도'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이다. 하지만 평생을 자영업과 전문직의 영역에서만 지내온 탓에, 이제 막 거친 기업 생태계에 던져진 아들의 고민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었나 보다. 친구는 내게 "일반적인 조직 생활과 기업의 생리를 아들에게 좀 들려달라"며 조언을 부탁했다. 그것은 친구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제안이자, 부모로서 건넬 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실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답하면서도 내심 의문이 들었다. 다 큰 20대 아들이, 엄마의 등쌀에 밀려 주말 오전에 '엄마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할까? 마지못해 나와 앉아 시계만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P군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이 만남을 '부모님 잔소리의 연장선'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과 대화하며 느꼈던 답답함, 본인이 품고 있는 깊은 고민과 갈증을 2시간 넘게 쏟아냈다. 나의 서툰 조언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그의 눈빛을 보며, 나는 그 안에서 꿈과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귀한 '야성'을 느낄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P군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서 성공적인 시작을 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최대한 빨리 다른 직종으로의 전환을 꿈꾸고 있었다. 평생 안정적인 궤도 위를 걸어온 그의 부모에게, 아들이 이 견고한 새장을 스스로 열고 나가려는 모습은 대책 없이 거친 풍랑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함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가 정보의 전달자에 머물지 않고 직접 필드에서 뛰는 '플레이어'가 되려 하는지, 커리어 전환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관리해야 하는지, 조직 내 인간관계와 감정 표현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과를 어떻게 자신의 성장으로 치환할 수 있는지 등등.


아마 그의 수많은 고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생존'이 아니라 '성장'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전함'이었다.

"안전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




P와 대화하는 내내 우리 딸아이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내 자식에게는 잔소리가 될까 봐 차마 전하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이, 친구의 아들에게는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50대가 되어 깊이 느끼는 점이 있다면 내 정원에 심은 나무만이 내 나무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 자녀에게 미처 주지 못한 거름을 친구의 아들에게 건네며, 나는 그가 울창한 푸른 숲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커피 잔이 다 비워질 무렵,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가 더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내가 아는 지인들과의 커피챗을 주선하기로 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기로 했다.


헤어지면서 P가 말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어주시고,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젊은 기운에 자극받고 배울 기회를 얻었으니, 오히려 감사한 쪽은 나였다. 나는 앞으로의 그와의 만남은 일종의 '역멘토링(Reverse Mentoring)'의 기회로 삼을 생각이다.


P군과 나눈 구체적인 대화의 조각들은 앞으로 이어질 글들을 통해 하나씩 따로 정리해 보려 한다. 그와의 대화는 나에게도 많은 것을 되짚어 보게 했고,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결코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2025년 12월)




Cover Image: unsplash @m_amirahm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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