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누군가 나를 ‘드저씨’라고 불렀다. ‘드라마 좋아하는 아저씨’라는 뜻이라는데,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드라마를 엄청 챙겨보는 것은 아니지만, 평이 좋거나 화제가 된 작품은 어지간하면 보기 때문이다. 특히 <미생>, <나의 아저씨> 같은 직장인 드라마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요즘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재밌게 보고 있다. 웃기고 짠하고 인간적이다.
놀라운 건 극 중 주인공인 김 부장의 나이가 나와 같고, 심지어 학번까지 같다는 사실. 그걸 알고 난 뒤부터는 드라마가 갑자기 다큐처럼 보였다. 김 부장의 회사 생활과 표정이 이상하게 남 얘기 같지 않다.
올해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 딱 30년 되는 해다. 드라마 속 김 부장도 어쩌면 올해가 졸업 30주년일지 모른다.
10년 전, 20주년 모임 이후 조용하던 동기들 단톡방이 오랜만에 소란스러워졌다. 부모님 부고 소식 정도만 드문드문 올라오던 방이었는데, 누군가 “30주년인데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는 말 한마디가 불을 지폈던 것이다. 그 결과 모교와 연계한 공식행사는 없었지만, 고향인 부산에서 한 번, 또 서울에서 한 번 시간 되는 친구들끼리 다시 모이게 되었다.
흥미로운 건 대화의 중심이 20주년 때와는 또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는 자녀 이야기 일색이었다. 아이들이 주로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이라 당연했다.
하지만 30주년이 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자녀들은 이미 대부분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거나 독립한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취업이 어렵다’, ‘AI 때문에 아이들 미래가 걱정된다’ 같은 이야기도 조금 있었지만,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대화의 중심은 명확했다. "건강", 그리고 "재테크". 결국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 자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이 주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번 모임에서 들은 가장 강렬했던 이야기는 이거다.
친구의 어느 지인이 오래전에 모 기업의 주식을 아주 싸게 사서 아들에게 대량으로 증여했고, 그 주식의 가치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덕분에 아들이 어느새 100억대 자산가가 되었다고 했다.
“와… 어떻게 그런 선견지명이?”
“부럽다, 진짜.”
순식간에 치맥 테이블 위에는 감탄과 부러움이 가득 쌓였다. 맥주잔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이 가볍게 흘렀다.
그런데 친구의 마지막 한마디가 모든 소리를 멈춰 세웠다.
“근데… 그 아들, 그 돈을 두고 자살했대.
그리고 그 아버지는 충격으로 지금 건강이 많이 안 좋아.”
순간 누군가 젓가락을 허공에서 멈췄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치킨집의 시끌벅적한 소음은 그대로였지만 우리들은 조용히 다른 세계로 떨어져 나온 느낌이었다. 모두가 음소거 모드가 된 듯 한동안 조용했다.
돈?
당연히 중요하다.
아주, 매우, 절대적으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돈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익숙하고 뻔한 말처럼 들리지만, 건강, 가족의 평안, 마음의 안정 — 이런 것들이 결국 인생을 버티게 하는 기둥이 된다. 그리고 50대는 이것을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나이가 아니라, 온몸으로 ‘깨닫는’ 나이다.
<책은 도끼다>에서 박웅현 작가는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이 생기고, 세월을 받아들이면 연륜이 생긴다”고 말했다. 요즘 부쩍 그 말이 이해된다. 순리를 거스르고 아등바등하기보다 힘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이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길일지도 모른다.
세상도 달라지고, 몸도 달라지고, 친구들 얼굴에도 세월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도 한편으로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 정도면 인생 후반전을 새로 시작하기에 괜찮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그리고 부디 앞으로의 세월은 나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모든 ‘김 부장’들에게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과, 조금 더 건강한 몸과, 조금 더 편안한 하루가 허락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본다.
(2025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