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미국 출장길에 뉴욕에 들러서 서현이를 보고 왔다. 믿거나 말거나 서현이는 이제 벌써 대학생활의 반을 보낸 어엿한 3학년이다.
코로나 탓에 서현이 학교에 처음 와본 나는 딸이 다닌다는 이 학교가 그저 좋기만 하다. 어쩌면 내가 졸업한 학교보다도 더. 교내 서점에 들러서는 학교 로고가 박힌 옷가지며 컵이며 모자 등등을 보자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서현이는 그런 물건이 하나도 없어 보이기에 아빠가 하나 사 줄까냐고 물었다. 그러자 서현이 왈, 이제 막 입학한 어리버리한 아이들이 주로 그런 걸 입고 다닌단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졌다. 내 모습이 이제 갓 들어온 신입생의 신난 모습과 비슷한 모양이구나.
늦은 시간에 뉴욕에 도착한 탓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아래에 즐비한 한식당 중 하나로 나를 안내하는 서현이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인파를 헤치며 나아간다. 나는 그런 서현이를 행여나 놓칠세라 뒤에서 역시 빠른 걸음으로 열심히 졸졸졸 따라갔다. 마치 엄마 뒤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아기오리 같다.
문득 십수 년 전, 나 자신이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학기가 시작하는 것에 맞춰서 서둘러 출국했던 나는, 서현이 엄마가 서현이와 함께 한국에서 뒷정리를 하고 미국에 합류하기 전까지 4개월 정도를 혼자 생활해야 했었다. 낯선 미국에서의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당시 아직 세돌이 채 되지 않았던 서현이가 전화선 너머로 들려주는 ‘아빠 사랑해요’에 없던 힘마저 불끈 솟아나는 것 같았고, 반대로 아빠가 보고 싶다며 서현이가 칭얼대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도 함께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눈물이 그렁거리기도 했었다.
4개월 후에 서현이는 뉴욕 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일찍부터 JFK 국제공항에 마중을 나갔던 나는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한 것을 확인한 직후부터 1시간 넘게 입국장 문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현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기다림의 시간 끝에 마침내 입국장 문이 열리면서 조그맣던 서현이가 자박자박 걸어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거의 울 뻔했었다.
달려가서 팔을 활짝 벌리고 “서현아”하고 부르자, 그제야 나를 발견한 서현이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나도 서현이를 꽉 끌어안았다. 몇 달 동안 무척이나 안아보고 싶었었다.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서현이…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나는 서현이 얼굴을 보려고 안고 있던 손을 살며시 풀었다. 그런데 그때 서현이는 나를 더 세게 꽉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엉거주춤 쭈그린 상태로 한참을 더 서현이에게 안겨 있었다. 서현이는 정말 오랫동안 나를 안고 있었고 그렇게 안겨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도 다시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때의 그 느낌, 그 전율은 지금도 내 몸의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가 다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던 서현이가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서 거꾸로 뉴욕에서 나를 맞아주는구나…
한인타운의 한 식당에서 나는 서현이가 따라주는 소주를 처음으로 받아보았고, 또 서현이에게도 처음으로 술 한잔을 따라주었다. 생경한 느낌.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저 좋기만 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닌 이상한 느낌이다. 서현이도 그런 내 표정을 읽었던 것일까?
아빠, 좀 어색하지 않아?
서현이가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뉴욕에는 금요일에 도착해서 월요일에 다시 보스턴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출국 전에 다시 뉴욕을 잠깐 들리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주말 동안 서현이와 데이트를 할 생각에 마음이 잔뜩 부풀었다. 금요일에는 같이 저녁을 먹었으니, 토요일에는 함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 일요일에는 센트럴파크를 같이 산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서현이가 낮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기에 할 수 없이 다소 늦은 오후에 만나서 곧장 브로드웨이로 향했다. <오페라의 유령>을 골랐는데 좋아할 줄 알았던 서현이는 뮤지컬 공연 중간중간에 꾸벅꾸벅 졸았다. 재미가 없나? 아니면 많이 피곤한 건가?
생각해 보니 그때라도 내가 깨달았어야 했다. 서현이도 이제는 자신만의 삶이 있는 독립적인 성인이라는 걸. 어려운 과목들 공부하느라 해야 할 것도 많고, 시험도 늘 일상인 것 같고, 그 와중에 친구들이랑 어울리기도 하고 연애도 해야 할 테고… 그럼에도 아빠가 같이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하니 없는 시간 쪼개서 뮤지컬 보러 와 준 것부터가 참 고맙고 미안한 일이라는 걸.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뉴욕의 센트럴파크에 서현이와 나들이 갈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러다가 서현이에게서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자신의 스케줄상 주말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아 난감하다는 말을 어렵사리 하는 서현이.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철부지 아이가 아빠에게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것처럼 거꾸로 내가 서현이에게 놀아달라고 떼를 쓰며 부담을 주고 있었구나... 미안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에 잠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했다.
그래, 그러자 서현아. ^^;
일주일 후.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출국을 위해 다시 뉴욕을 찾았다. 서현이가 월요일임에도 고맙게도 짬을 내어주었다. 학교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같이 먹고 나서 워싱턴스퀘어 공원(Washington Square Park)의 벤치에 잠시 함께 앉았다. 그날따라 유별나게 날씨가 맑고 따뜻해서 그 시간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오가는 행인들을 쳐다보며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서현이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성인이 된 서현이와 어른 대 어른으로서 나누는 첫 대화였던 셈이다. 며칠 전 서현이와 처음 소주잔을 기울일 때처럼 약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좋은 느낌이었다. 이젠 아빠도 서현이에게 좀 더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하고 싶기도 하고 또 서현이에게서 이런저런 조언도 받고 싶다고 했다. 서현이도 아빠가 자신을 단지 ‘귀엽고 어린 딸’로만 대하지 않고 어른처럼 대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서현이는 활달하면서 속도 깊고, 자신감이 넘치는 한편 삶에 대해 무척 진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를 닮은 면도 있지만, 엄마 아빠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좋은 특성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빠의 딸이기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빠의 딸’만은 아닌 것이다.
당당하고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 딸을 바라보며, 고맙고 대견하고 미안하고 아린 마음이 복잡하게 얽힌다. ‘나이 든’ 아빠가 되어간다는 건 또 이런 느낌인가 보다.
(202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