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밀밀
이성을 만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소개팅을 주변에 요청하고 각종 모임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유행한다는 온갖 클래스를 신청해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반쪽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영화 같은 만남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노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그들은 끝내 목표한 바를 이루며 사랑을 쟁취한다. 자칫 영화에만 몰두하다가는 인연일 수도 있는 사람을 '노력파'에게 빼앗기고, 결국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천금 같은 기회들을 놓치다 ‘청춘’을 소비해 버리고 만다는 건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어느새 연애시장에서 점점 존재감이 약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연한 만남과 영화 같은 사랑은 쉽게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카페나 버스에서 낯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만남은 얼마나 달콤하냔 말이다.
“아빠. 엄마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
“아주 영화 같았단다.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하지 뭐니. 취미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도 비슷하고. 마침 각자 계획했던 발리 여행 일정이 딱 맞아서 정말 놀랐었단다. 마치 운명 같았지.”
“음… 약간의 의견차가 있는 것 같네. 당시 호감을 갖고 있던 아빠를 만나기 위해 SNS를 뒤져 취미와 관심사를 알아냈고, 거기서 여행을 떠난다는 게시물을 보고 같은 날 출국하는 티켓을 급하게 구매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하지만 이 정도의 노력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이후에 벌였던 여러 노력들에 비하면 아주 쉽고 가벼운 일이었지.”
“자… 자기야…”
“어설프게 도망갈 생각하지 마 나무꾼. 넌 이제 내 거니까.”
“어…. 엄마….”
“딸아. 사랑은 노력하는 사람이 쟁취하는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렴.”
가만 보면 운명 같은 사랑 역시 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작정 운명 타령만 하다가는 찾아온 운명을 허무하게 놓쳐버리는 수가 있다. 영화 첨밀밀은 사람을 함에 있어 운명과 노력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둘의 균형이 꽤나 절묘해 더 흥미롭다. 그렇다고 내가 유부남이 된 마당에 운명적 만남을 꿈꾸기 위해 찾아본 건 아니었다. 그냥 돌아볼만한 건 추억밖에 없는 중년이 과거를 뒤적이다, 홍콩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결국 첨밀밀까지 본 것이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봤던 영화고 무척 좋아했던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했다. 이렇게까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잔잔한 로맨스 영화 정도로 짐작했던 예상과는 달리 꽤나 격정적인 사랑을 담고 있었다. 중국 본토 출신으로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온 소군(여명 분)과 이교(장만옥 분)는 맥도널드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약혼녀가 있던 소군은, 그럼에도 이교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특히 좁은 방 안에서 옷을 입혀주는 장면이 매력적인데, 이제 막 사랑이 시작된 두 남녀의 풋풋함과 뜨거움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남이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인 두 사람은 그저 잠깐 서로에게 마음을 주기는 하지만 로맨스는 아니라 부인하며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차마 약혼녀를 버리라고는 못하는 거다. 애인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면 쌍욕을 날려주고 싶겠지만, 왠지 두 사람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애인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데도 이교와 소군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랐다. 아마 관객이 된 순간, 내 윤리보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한껏 감정이입을 하고 나니, 이건 분명 로맨스였다. 봄날은 간다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했지만 사랑은 변하고, ‘부부의 세계’ 속 이태오가 했던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둘은 결국 헤어지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된다. 우연히, 첨밀밀(甛蜜蜜, Tian Mi Mi)이라는 정말 달콤하다는 뜻의 음악과 함께.
예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한창 사랑이란 감정을 배워나가던 시절이어서였을까, 그냥 너무 좋은 영화라고만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무척이나 감동적인 영화였다고 호들갑을 떨며 주위에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는 둘만의 사랑이 아닌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감정까지 이해하는 나이가 되고 나니 그저 ‘사랑’만 보이지는 않는다. 마냥 순수한 때가 있었는데, 온갖 상황을 고민하고 있는 내가 아쉽다.
비록 지금은, 삶에 찌들어버렸지만 여전히 연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다. 사랑을 하고 있었지만 더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 사람과 더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 전, 헤어짐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갑자기 만난 새로운 사랑과 먼 미래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누군가에게 상처 줘야 하는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어차피 이뤄질 사랑일지라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쟁취할 수 없는 노릇이니깐. 다시 말해 운명 같은 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사랑이 반드시 가장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쁜 선택이 될지 혹은 좋은 선택이 될지는 난 모르겠다. 그저 청춘의 달콤한, 더 달콤한 사랑을 응원할 뿐이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니, 영화에 너무 빠지진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