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필요한 것은 뻔뻔함이다

파벨만스

by 윤태진

한때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꽤 오랫동안 간직한 꿈이었고, 구구절절 다 적을 순 없지만 수많은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었음을 고백한다. 물론 종종 작은 성과들이 있었지만 결국 영화판에 뛰어들 용기가 없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는데, 열정이 부족했던 것이기도 하다. 막연한 꿈을 좇아 인생을 걸기에는 난 이미 안락함에 젖어있었다.


아마도 스필버그의 자의식이 투영되었을 파벨만스의 주인공 ‘새미’를 보며,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저 정도는 되어야 감독이란 걸 하는구나 싶었다. 또 진작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타고난 재능의 무서움을 점점 더 절실히 인정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재능이 좋은 사람들은 노력까지 한다. 결국 어설픈 능력만 가지고는 결코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 수 없다는 거다. 물론 내 인생에서야 내가 주인공이겠지만, 우리 집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세상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은 만족감이나 성취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이를 먹는 것의 거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욕망과 욕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과 좌절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마치 영화 속 ‘새미’의 삶처럼 말이다.

‘새미’의 삶은 그야말로 다사다난이다. 어머니의 불륜, 학교에서의 따돌림, 폭력, 서툰 연애와 그 와중에 성장해 가는 나,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은 여전히 변함없다. 오히려 조금씩 발전하고 견고해져 간다. 다시 말하지만 똑똑한 것들이 열심히까지 한다는 게 참 질투 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새미의 삶을 보며 삶이 어떻든, 꿈을 이루는데 어떤 핑계와 변명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감독은 우여곡절 많은 삶을 통해 역설적으로 더 명확하고 간결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누구의 삶이든 ‘사연’들은 존재하고 그를 이겨내든, 고쳐내든 또 혹은 잘 활용하든 그건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결국 엄마는 사랑을 찾아 떠나고 남은 것은 새미와 아빠 단 둘 뿐이다. 그럼에도 새미의 영상과 영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전하다. 끊임없는 도전으로 결국 면접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영화감독은 그야말로 업계 최고의 감독이다. 그런 감독들이 의례 그렇듯 괴팍하고 괴짜스러워 보이는데, 처음 본 새미를 향해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다. 표현 방식은 다소 과격했지만, 영화 선배로서 초보 감독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전한다. 너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냐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산다면 그저 그런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경고일 수도 있다. 혹은 감독이 되려면 남들보다 창의적인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그야말로 원포인트 레슨이었다.


달라지려면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다르다는 게 꼭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창의성과 기발함으로 얼마든지 상쇄가능하다. 비단 영화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일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를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선로를 벗어날 용기가 없어서다. 그렇다고 무작정 새로운 것을 도전하라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때는 더욱더.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닌, 실패한 후 태연할 수 있는 뻔뻔함이다. 그래야 다시 하고 또다시 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 약간의 자기 합리화만 더해지면 충분하다. 그럼 이제 무적의 오뚝이가 되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아마도?

나 역시도 뻔뻔함을 무기로 이렇게 글을 쓴다. 영화로 풀어내지 못한 예술혼을 글로 대신하는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실패의 연속이다. 빛을 보지 못한 단편 시나리오 몇 편과 미완의 소설 몇 편이 컴퓨터 안에만 있다. 슬픈 일이지만 언젠가, 느닷없이 좋은 일이 있으리라 내 멋대로 믿으며 산다.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어차피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이니 괜찮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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