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옅어지는 꿈
마케터 C는 ‘즐거운 책 잔치’에 참여 중이지만 전혀 즐겁지가 않다. 휴일 근무 수당이 나올 리도 없고 휴일근무 수당을 당당히 요구하는 선배도 없다. 마케터로서 책을 팔려면 휴일 근무 정도는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책이 잘 팔리면 ‘더 팔아야 하니까’ 휴일에 일을 하고, 책이 안 팔리면 ‘더 팔아야 하니까’ 휴일에도 일을 한다. C는 불합리함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어, 휴일에도 ‘나오라니까’ 나온다.
얄궂게도 비가 내린다. 가을을 맞이하는 비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다. 작년에도 이 행사에 비가 왔던 것 같았다. 날짜 한번 기가 막히게 잡았다고 생각했다. 종종 부스를 찾는 손님들이 있지만 우산을 접고 들어오기가 귀찮은지 겉에서 슬쩍 바라보곤 가던 길을 재촉한다.
C가 손님 없는 부스에 멍하니 앉아있다. 차라리 책이라도 잘 팔리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귀찮던 차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쉬는 날 열심히 팔아봐야 사장만 신날 뿐이니까. 아침마다 늘어놓는 잔소리를 스스로는 중요한 가르침이라 생각하는 사장의 그 오만하고 건방진 표정을 볼 때면 잘 팔던 책도 못 팔고 싶어 진다. 다행히 오늘은 책이 팔리지 않았다. 주말 매출 보고서를 받아 들 사장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이거 팔라고 직원을 그렇게나 부려먹었나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만 해본다. 어차피 사표를 낼 생각이니까 떠날 마당에 안 좋게 해어질 필요는 없다.
C가 지루한 마음에 매대에 쌓인 책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갖고 싶었던 책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편집자가 만든 책이라 관심 없는 척 외면했던 책이다. 보통 편집자들은 신간이 나오면 직원들에게 나눠주지만 C는 마케팅 부서에서 유일하게 책을 받지 못했다. C는 잘 팔릴 것 같은 신간의 표지를 보며 다시 한번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뭐 대단한 책이라고... 예쁘기는 하네.
슬쩍 주위를 둘러보곤 못 이기는 척, 책의 첫 장을 넘겼다. 감사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작가의 인사말이 담겨 있다. 달랑 두 줄의 메시지가 흰 종이 한가운데 쓰여 있다. C는 종이를 이렇게 낭비할 수 있는 작가의 특권이 부러웠다. 꿈꾸던 첫 책을 출간하고, 작가로 데뷔하면 간절히 갖고 싶었던 페이지다. C는 종종 습작을 쓸 때면 책의 첫 페이지에 누구에게 감사함을 전할지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 감사함의 대상은 늘 바뀌었는데 한 때는 부모님이었다가 또 언젠가는 애인이었다, 편집자와 사이가 좋을 때면 편집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감성 충만한 날이 될 때면 책을 펼쳐 드는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는 허세 가득한 문장을 준비한 적도 있다.
다시 몇 장을 넘겨 궁금했던, 기대했던 작가의 문장을 빠르게 훑어갔다. 단정하고 간결한 문장이 눈을 스치며 지나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 하지만 그 놀라운 힘에 곧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가슴 벅찬 문장에, 마음을 울리는 문구에.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서사를 읽으며 기쁨과 좌절감을 함께 느꼈다. 그와 나의 격차를 실감하며 그래서 나는 여전히 마케터이고 그는 소설가임을 되새긴다.
처음 출판사에 발을 들였을 때는 그저 책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책에 파묻혀 일하다 보면 그 성스러운 기운에 경도되어 나도 곧 책을 출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많은 문학도들이 그렇듯 신춘문예의 벽을 뚫지 못했고 아쉬운 마음에 이 동네를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 동네의 많은 편집자들이 비슷한 심정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다.
C도 처음에는 편집자로 입사를 했다. 편집자로 일하며 끊임없이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출판사의 문학상에 도전했다. 그리고 운이 나빠 떨어졌다고 자위하며 다시 기약 없는 도전을 이어나갔다. 편집자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접하는 것은 충분히 자극받는 일이었다. 습작 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일했다. 하지만 규모에 비해 편집자가 넘쳐났던 회사는 C를 마케팅팀으로 보냈다. 얼굴이 예쁘고 말하는 게 호감 간다는 게 인사이동의 이유였다. 그때 시원하게 욕하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다.
C는 갑작스러운 마케팅팀으로의 인사이동에 당황했지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로 닥친 일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관계가 복잡하게 얽힐수록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몰랐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니 편집자로서의 재능이 부족해 마케팅 부서로 떨궈진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더구나 최근 편집자를 뽑는다는 구인광고가 올라온 걸 봤다.
문득, 돌아보니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작가에서 편집자로 그리고 이제 전문 마케터가 되었다. 작가가 되리라는 꿈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C는 보이지 않는 꿈을 잡고 있느니 차라리 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미련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더 이상의 무의미한 에너지 낭비는 그만두라며 손에 든 책의 작가가 자신의 문장을 눈앞에 들이미는 것 같았다. 더없이 훌륭한 문장이었다.
C는 마케터가 되어 책을 열심히 팔았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던 그녀였기에 책 파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밤이고 낮이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그리고 즐거운 책 잔치에서도.
C는 다시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마침 다른 큰 출판사에서 더 큰 연봉으로 제안을 주었기에 퇴사를 좀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다른 출판사가 제안한 일도 마케터 역할이었다. C는 어쩌면 마케팅에 자신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글 쓰는 것보다 남을 설득하는 소질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는 게 아니라고도 했다. 글 쓰는 일은 정말 좋아하는 일이니까 직업으로 삼지 않아도,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어디로 자리를 옮기든 손에 든 이 책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딜 가든 이 책은 여전히 빛날 테니까 내 돈 주고 당당히 사서 보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