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래 결혼을 하겠다고.”
비 내리는 출판단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아름답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평상시에도 참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하지만 비 오는 날은 또 다르다. 시원한 빗소리 외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출판단지에 운무와 고독이 더해진, 운치가 깃든다.
개성 강한 건물들이 비에 젖고 건물 사이 숨겨진 연못에 물이 차오른다.
추적추적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쓸려 나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실제 길가 가장자리에 위치한 배수구를 보면 검게 변한 더러운 물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역시 시원하게 씻겨 나가는 한적한 도로를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여긴 이렇게 한적한데 자유로는 아마 엄청 막히겠지? 원래도 막히는 길이 비가 오니 또 얼마나 심하게 막히려나? 서울에 대체 뭐가 있길래 다들 그렇게 서울로 달려가는 걸까? 그리고 과연 난 약속 시간 안에 갈 수 있을까? 귀찮은데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볼까? 아니면 이제라도 약속을 취소할까?
말로만 하는 흔해빠진 약속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와 다짐한 후로는 ‘다음에 한번 보자’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다음에 한번 보기 위해 파주에서 서울까지 나가야 하는 일은 꽤나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은 잠잘 시간도 부족하다. 하지만 결혼한다는 친구의 부름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해줄 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네가 어쩐 일로 전화냐."
"뻔하지 뭐."
"생전 전화도 안 하던 놈들이 꼭 지 결혼한다고 연락하더라."
"너 이 새끼 잔소리할 거면 끊고."
"공짜 술 먹게 생겼는데 끊긴 뭘 끊어."
결혼이라니. 웃으며 악수를 나누며 말해줄 생각이다. 환영한다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네 인생에 기다리고 있는지 아느냐고. 아마 상상 그 이상일 것이라고. 아이도 바로 가질 생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더욱 격하게 환영한다.
나만 이런 ‘격한’ 경험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동안 너무 신나게 놀아온 녀석이다. 해줄 말이 너무도 많다. 그러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유로를 달려 서울로 가야 한다. 하지만 내리는 비를 보니 며칠 정도는 녀석에게 즐거운 환상의 시간을 줘도 좋을 것 같다.
약속을 취소하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비가 많이 오니 그냥 나중에 보자고 할 생각이었다. 친구에게 걸린 휴대폰의 신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이런...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제 비가 그치려는지 검은 구름 사이사이 흰 구름이 눈에 띈다.
"어디냐?"
"나 이제 거의 도착. 오고 있지?"
"가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지나치게 부지런한 친구다. 서둘러 의자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네 녀석이 정녕 축하를 받고 싶다 이거구나. 그렇다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친히 달려 나가 주겠다. 을씨년스럽게 비가 오는 게 축하받기에 딱 좋은 날씨긴 하구나.
“자 그래 결혼을 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