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빠져버렸다
게임에 빠져버렸다. 물론 푹 빠진 것은 아니다. 쌍둥이 육아를 하고 있는 아빠의 신분은 무엇이든 푹 빠질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어쨌든 그 힘든 와중에 게임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게임을 하며 새로운 세상을 접했다. 사람들이 점점 더 책을 안 읽고 있다는데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막연히, 책 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니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그 ‘책 보다 재미있는 세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게임 속 세상은, 그저 놀랍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새로운 문화를 처음 접한 탓에, 낯선 경험이 주는 자극이 더해졌을 테지만 게임은 말 그대로 재미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더 하고 싶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이 대체 얼마나 많을까 싶었고 나만 이런 걸 모르고 살아온 것인가 싶은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참 다행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들이 더 없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찾아보니 평생을 하기에도 모자랄 만큼 많은 것 같다.
그렇다 그 존재만으로 난 이미 행복을 느끼는 중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유행이다. '소확행'이라고 하더라. 사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큰 행복을 좇으며 살지만 결국 행복한 순간을 작은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다. 응원하던 축구팀이 이겼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기다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서자마자 왔을 때, 오랜만에 친구한테 안부 전화가 왔을 때와 같이 행복은 애초에 작았는지 모른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사진 중 물이 담긴 욕조 속에 빠진 플레이스테이션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합성인 줄 알았는데 실제 물에 잠긴 불운의 플레이스테이션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부부싸움의 결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싸움이야 남의 사정이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을 즐겨하던 주인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고도 남았다. 한순간 그의 모험과 싸움은 끝나버린 것이다. 그의 불행을 보며, 무사히 책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녀석을 천천히 쓰다듬어보았다.
"그러니까, 플레이스테이션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니 게임을 하기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랑도 놀아줘야 하고, 밥도 잘 차려야 하고, 아이들 씻기는 것도 완벽히 끝내야 한다. 아내에게 공격할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 그렇게 아이와 아내가 모두 잠들고 세상에 고요가 찾아오면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듀얼쇼크'를 집어 들고 의자에 앉는다. 모니터에 집중하기 위해 방안의 불은 끈 상태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잠이 온다. 놀고 싶은데 몸이 피곤하다. 몸의 상태를 보니 한 시간 정도면 한계에 부딪힐 것 같다. 나의 여행은 이제 시작인데. 나의 전쟁도 이제 막 시작인데... 손에 든 듀얼쇼크가 연신 울려대며 극적인 상황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런 게 행복이다. 암 그렇고 말고.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책을 사랑한다. 최근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다.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다니자키의 소설을 보고 '그저 탄식할 뿐! 다니자키의 작품은 더할 나위 없는 걸작이다.'라고 평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그처럼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를 사랑한다.'라고 작가의 뛰어남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 그의 작품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그가 표현하는 사랑은 내밀하고 야릇했다. 소설은 '사미센'이라는 일본 전통 악기를 가르치는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라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둘의 사연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 또한 평범하지 않다.
격정적인 사랑의 묘사가 이뤄지는 것도 아닌데 소설은 이야기 내내 은밀한 사랑을 속삭인다. 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이 남긴 여백은 독자의 상상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그 부분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자칫 게임으로 마음을 뺏길뻔한 요즘 다시금 책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게 만든 소설이었다. 역시 책과 게임, 각자의 매력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실컷 게임 얘기만 해놓고서는 서둘러 책을 응원하는 글로 마무리하는 건 책을 사랑해 달라는 마음에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도 여전히 책이 걱정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