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했던 고생이 그립다

고요한 정적과 고통의 신음이 자전거 페달 소리 사이사이를 채웠다

by 윤태진


스물한 살 피 끓던 청춘의 시절, 우리의 목표는 거창했다. 부산에서 출발해 동해를 거슬러 올라 강원도 강릉까지 갔다 돌아오겠다는 목표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전거 대여점에서 빌린 자전거 한 대 달랑 들고. 자전거 여행이란 걸 과감히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나게 달렸다. 약 30분 정도? 그리고 곧장 허벅지와 무릎, 엉덩이에 심상치 않은 피로가 몰려왔다. 이때 그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여행을 멈췄어야 했다. 우린 자전거 여행을 위한 준비가 조금 더, 아니 꽤나 많이 필요했다. 가방 안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집어넣은 쌀 봉지 하나와 뭐라도 해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실어온 코펠과 버너가 전부였다. 잠은 따뜻하게 자야 한다며 역시 대충 쑤셔 넣은 침낭 하나가 그토록 소중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 녀석은 정말 자전거 한 대만 달랑 들고 왔다.

그때라도 암울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가만 뒀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돈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피는 끓고 있었고 손에는 자전거가 들려 있었으니, 달려야 했다.


신나게 떠들며 달리는 건 정확히 한 시간이 넘어가며 멈추었다. 고요한 정적과 고통의 신음이 자전거 페달 소리 사이사이를 채웠다.

갑작스러운 육체적 고통과 함께 고난이 시작되었다. 친구 녀석의 자전거 바퀴가 펑크가 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금방 멈출 것 같았던 빗줄기는 점차 굵어져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가방을 적셨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향하는 국도 어딘가에서 우린 자전거 수리 가게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한적한 국도변에 자전거 수리점이 있을 리 만무했고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비는 점점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고 해도 저물기 시작했다. 가로등조차 많지 않았던 시골의 국도는 어둠에 휩싸였다. 더구나 때마침 나타난 내리막길을 앞두고 자전거를 끌고 걸어 내려가야 하다니 애꿎은 친구 녀석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사실 왜 타이어 펑크를 냈냐고 구박을 했었다.

이제 겨우 반나절 정도를 달렸을 뿐인데 체력은 이미 방전이고 왜 이런 짓을 시작했을까 하는 의문으로 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가장 현명한 제안을 했지만 한 달 정도 뒤에 돌아오겠다고 거창하게 부모님께 포부를 밝히고 온 터라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하루 반나절 만에 돌아가겠다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늘 그 자존심이 문제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작은 시골 마을 한 곳에서 우린 오토바이 수리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오토바이도 자전거랑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니 이까짓 자전거 펑크 하나쯤 수리하는 건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에 젖어 거지꼴을 하고 있는 세 녀석이 자전거를 끌고 와 살려달라고 하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수리점 사장님은 흔쾌히 타이어 펑크를 때워줬다. 마치 돈을 받지 않을 것 같은 유쾌한 웃음이었지만 오천 원을 달라고 했던 반전의 남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돈 이천 원이 아쉬워 삶은 계란도 다섯 개밖에 못 샀던 우리에게 오천 원은 큰돈이었다. 그러니 큰돈을 쓰고 가게를 나오는 우리의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그때까지도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우리는 울산대학교 학생회관 앞 현관에 돗자리를 펴고 첫날의 여행을 정리하였다. 당시 대학생이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곳이라곤 대학교가 전부였고 학교 빈 강의실에 들어가 잠을 잘 생각이었지만 건물들은 굳게 잠겨 있었다. 겨우 학생회관 정문 앞에 돗자리를 펴고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겨우 그쳤던 비는 늦은 새벽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우린 차가운 비를 맞으며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비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그날만큼은 비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런데,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힘들고 괴로운 날이었던 그때가, 비만 오는 날이면 떠오른다. 자전거 여행 내내 비를 맞으며 달려야 했던 그 시간들. 장마인 줄도 모르고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던 그 터무니없는 준비성까지 그립다.

한적한 국도변, 내리는 비와 어둠이 뒤엉켜 마치 미지의 세계를 달리는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평생의 기억이 되어 비 오는 날이면 불쑥불쑥 떠오르는 추억이 될는지.


길지 않았던 우리 여행은 온갖 사건 사고를 벌이며 삼 일을 더 이어갔고 기어이 포항의 어느 동사무소 앞 길거리에 퍼질러 누우며 여행은 끝이 나고 말았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끼리 말다툼이 있었고, 자전거 여행에 대한 빠른 포기와 화해, 타협이 순식간에 이뤄졌던 것 같다.

두 대의 자전거는 택배를 이용해 집으로 붙이기로 했고 나머지 한대는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버려진 자전거는 포항의 한 동사무소 앞에 세워두고 왔으니 이 자리를 빌려 동사무소 직원분에게도 죄송함을 전한다.

돌아올 때는 쾌적하고 빠른 기차를 이용했다. 좌석을 구매할 돈은 없었으므로 입석표를 구해 기차 구석진 곳에 퍼질러 앉아 문명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며 부산으로 돌아갔다.

자전거는 참 불편하고 힘든 녀석이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던 여행이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는데, 사서 했던 고생이 이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이 그립다. 물론 지금도 친구들은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예전의 그 모습일 수는 없다. 나 역시 예전의 내가 아니다. 아직도 철없는 녀석들인데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다. 다시는 자전거 여행 따위는 할 수 없을 만큼 나이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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