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로 떠난 여행작가 K

문제는 여행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by 윤태진
좋았던 시절, 발리에 가서 찍었던 사진


여행작가 K는 일단 뭐라도 찍자고 생각했다. 뭘 써야 할지 생각이 안 날 때는 그냥 찍는 게 상책이라는 건 다년간 여행작가로 살아오면서 얻은 노하우다. 일단 뭐라도 찍어두고 숙소 책상에 앉아 찍은 사진을 보며 당시는 느끼지 못했던 감상을 끄집어내면 된다. 혹은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K는 길가의 평범한 풍경을 사진으로 담으며 '낯선 땅에서 발견한 투명한 자아' 따위를 써보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투명한’은 화장품 광고를 떠올리지만 뭔가 멋있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투명한’에 또 어떤 이야기를 갖다 붙일지는 나중에 고민하면 된다.


한 때는 평생 여행만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K였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떠난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과 동남아 등을 돌았고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글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재기 발랄한 그의 글은 유저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프로 여행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이보다 행복한 직업이 있을까 싶었다. 매일 저렴한 가격으로 때론 공짜로 여행을 다녔고 여행지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글로 쓰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여행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낯선 숙소에서 자는 것도 일이 년이지 매일 어디론가 떠돌아다니는 삶은 육체와 정신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감성 가득한 여행기를 쓴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놀랄 감성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었다. 특히나 유럽은 여기가 저기고 저기도 여기 같았다. 체코에 앉아 독일의 여행기를 쓰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얘긴데 실제 K의 경험이다.


‘아이고 삭신이야.’


요즘 들어 K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돌아다니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 그렇게 신나고 설레던 비행기 타는 것도 곤욕이다. 1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유럽이나 미국 혹은 그 이상 날아야 하는 나라로의 여행은 이미 비행기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만다. 이제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 정착하자니 먹고 살 걱정이 앞선다. 더구나 최근에는 너도나도 여행작가를 하고 있어 초창기 여행작가의 특별함과 신선함이 사라진지 오래다. 더구나 젊은 작가들은 용감했고 진취적이며 영리했다. 빼어난 글은 물론이거니 들고 다니는 카메라 역시 사진작가 뺨치고 다닐 정도로 살벌했다. 찍어내는 사진을 보면 차라리 사진작가를 하지 왜 이러고 다니냐고 말해주고 싶다. 여행작가 동네가 여간 치열해진 게 아니다. 그러니 맘 놓고 한국에 정착해 있을 수도 없다.

K는 똥줄이 바짝 탔다. 어쩌자고 여행작가라는 걸 시작해서 이러고 사는지. 역시 좋아하는 일은 업으로 삼는 게 아니라고 때늦은 후회를 하는 중이다.

이번 여행은 신문사에서 요청한 칼럼의 연재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받기는 했지만 대체 또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이제는 쓸 소재도 바닥이 났고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도 한계였다.

늘 비슷한 유형의 글을 눈치챈 담당 에디터는 자꾸 '뭔가 특별한 것, 자극적인 것'을 요구했지만 그런 걸 쓰기에 K는 이제 너무 지쳐버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어떤 것에도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극적인 것도 별로 없었다.

한 때는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낯선 여인과의 로맨스를 꿈꾸며 다녔던 적도 있었다. 실제 제법 잘생긴 K는 외국에서 만난, 여행으로 조금은 흥분상태에 빠진 여인들과 호들갑스러운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리고 짧은 여행 후 돌아가야 하는 여인들과 역시 호들갑스러운 이별을 하고 그 가벼운 이별의 아픔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K의 글이 여성들에게 유난히 더 사랑받는 이유는 그 아픔이 묻어나서다.

하지만 그도 나이가 들었다. 사랑이 가득했던 그의 여행은 늘어난 얼굴 주름과 부풀어 오른 배 덕분에 외로움으로 채워지고 있다. 언젠가 K는 파리에서 만났던 두 여인에게 기세 좋게 다가가 몽마르뜨에서 와인 한잔 마시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파리는 처음이신가요? 와인이 참 잘 어울리는 도시죠? 제가 좋은 곳 추천해드릴까요?"

“We can't speak Korean.”


그녀들은 K에게 영어로 말했다. 한국말을 못 한다고. 하지만 K가 그녀들에게 다가가기 전까지 그녀들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K가 멋쩍게 돌아서 걸어갈 때 “이상한 아저씨 많다더니 무섭다 야.”라고 한국말로 말하는 걸 듣고 말았다. K가 들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들은 별로 조심하지 않는 말투였다. 이후 K는 여행지에서 만난 여자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걸지 못했다.

K는 외국 중년들은 나이가 들면서 나름의 중후한 멋이 생긴다고 느꼈다. 풍성한 수염도 흰 머리카락도 심지어 대머리 외국인도 중년의 멋을 더했다. 하지만 최근 K는 빠지는 머리카락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배 나온 대머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부모님이 대머리는 아니니 탈모 걱정은 안 해도 되었지만 모자가 탈모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아무리 햇빛이 강해도 모자를 쓰지 않았다.

올 들어 최고로 더운 날씨를 기록 중이라는 인도네시아 발리였지만 K는 오직 선크림에 의지하며 땡볕의 시골 도시를 걸었다. 글이 부족하면 사진이라도 잘 찍자는 심산으로 구매한 중고 DSLR 카메라를 어깨에 들쳐 메고.


배고픈 원숭이 한 마리가 멀리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무를 타도 모자랄 원숭이 녀석이 태연하게 걸어서 다가왔다. K는 버릇처럼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며 셔터를 눌렀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라는 뜬금없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핑크색이나 흰색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모두의 예상을 깨고 파란색이라면 이번 원고는 대박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담당 에디터가 원했던 ‘특별하고, 자극적인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그때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K 작가님 아니신가요?”


한국말이었고 놀라 쳐다본 여자는 물론 한국인이었다. 더구나 아름답기까지 했다. K는 순간 힘이 솟았다. 기운 없던 K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찰나의 순간 온갖 말들이 머릿속에 뒤엉켰다. 작가다운 멋진 대답을 해야 했다. 여유롭고 능청스럽게. 중후한 멋을 풍기며.


“글을 쓰긴 하죠. 지금 쓰고 있는 건 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K는 겸손을 가장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싶었다.


“저 작가님의 팬이에요. 작가님 책은 한 권도 빼지 않고 다 읽었는데…”


K는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기분 좋은 발리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역시 여행은 행복한 일이라고 새삼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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