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완성은, '축의금'

당신과의 관계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합니다

by 윤태진


생전 연락도 없던 친구의, 후배의 전 직장 동료의 번호가 휴대폰에 뜰 때면 순간적으로 결혼을 떠올린다. 또 결혼을 하는구나. 평소 연락 한번 없다 결혼할 때만 얌체처럼 연락하는 사람들을 보면 연락을 끊어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주는 심정으로 그들의 간절한 기대에 응한다. 물론 그렇게 연락했던 사람들은 결혼과 동시에 그래 왔던 것처럼 연락을 끊고 만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 끊어진다.


외근을 다녀오니 책상 위에 청첩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나마 제법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고민 없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컴퓨터 안의 파일 보관함을 열어 검색창에 ‘축의금’을 적었다. 곧 검색에 ‘축의금’이란 이름의 엑셀 파일이 걸리고 파일을 열었다. Ctrl+F를 누르고 청첩장 속 주인공의 이름을 찾았다. 홍길동 5만 원. 최소한 그가 나에게 줬었던 축의금만큼 돌려줘야 예의다. 자칫 그보다 적게 주거나 깜박 잊어 축의금을 내지 않으면 큰 무례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축의금은 일종의 돌려주거나 받아야 하는 돈이다. 그러니 나 역시 5만 원을 넣고 잠시 고민 끝에 3만 원을 더 넣는다. 돈의 액수가 사람의 가치로 이어진다는 것을 결혼을 하며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는 형이 이런 말을 했다. 결혼식을 하면 인간관계가 정리된다고. 이건 무슨 소린가 했는데 바로 축의금 얘기였다. 결혼이 끝나고 축의금 봉투를 정리하며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는 뜻이다. 우선 축의금을 조금이라도 낸 사람은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 것으로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축의금을 내지 않은 사람은 왠지 빈정이 상해 연락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결혼식에 찾아가 축의금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결혼식에 찾아오지 않은 사람은 빌려간 돈을 갚지 않은, 몰상식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또 반대로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큰 액수를 봉투에 담았다면 사람이 달라 보이고 더 친근감이 생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아직 미혼이라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싶었는데 웬걸 정말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A는 나를 3만 원 정도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B는 10만 원이나 했네. 앞으로는 좀 자주 연락하고 지내야겠는걸.’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아니 내가 찾아갔던 놈들은 왜 안온 거지? 받을 것만 받고 모른척하기냐.’


형이 말했던 것처럼 실제로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것 같았다. 돈 몇 푼에 그동안 쌓아온 인간관계가 끊어질 수도 반대로 끈끈해질 수 있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더구나 그게 남의 생각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이라니 왠지 더 씁쓸하다. 뭐 돈 때문에 부모를 등지고 형제간에 원수가 되는 것도 흔한 일이니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결혼식 축의금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몇 만 원씩 더 챙겨 넣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돈독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것도 인간관계에 있어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려나.


나이가 들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주위 사람들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원치 않게도 그 사람들의 변해가는 모습, 변해버린 모습들을 볼 수밖에 없다. 차가워진, 따뜻함이 사라진, 미소가 없어진, 화가 많이 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의기소침해져 버린, 미신에 빠져버린, 의심이 많아진, 자신감이 사라진, 자만에 빠진, 허세가 가득한 사람들. 생각해보니 모두 별로 좋은 쪽으로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사회에 나와 온갖 일들을 겪으며 변해버린 탓일 것이다. 사실 변해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흔하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더 극단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다.

타인에게 비판적이던 사람은 타인을 비난하고 멸시하고 허세가 강했던 사람은 허언증에 시달릴 지경에 이르고 고집 세던 친구는 아집만 가득한 아저씨가 되었다. 의기소침했던 사람은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으로 주위 사람을 괴롭힌다.


그들이 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결국 다 한 가지로 수렴되고 말 것이다. 역시 돈이다.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따지고 보면 역시 돈이 문제다. 돈이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한다. 그들 역시 3만 원짜리 봉투, 10만 원짜리 봉투로 마음이 변해버렸을 것이다. 이건 결혼의 문제도, 청첩장의 문제도 무엇보다 축의금이 문제도 아니다. 그냥 우리 삶이 원래 그런 거다. 그러니 명심해야 한다. 축의금을 내야 할 일이 생기면 고민하지 말고 반드시 내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이왕이면 많이. 다만 인간관계를 끊고 싶다면 축의금을 내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아주 명확한 의사 전달을 한 셈이니까.

‘당신과의 관계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합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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