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허망한 망상에 빠져 지혜의 숲을 몇 시간 째 헤맨다

by 윤태진


출판단지 중간쯤 '지혜의 숲'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책을 대여 해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도서관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지혜의 숲이 보유한 수만 권의 책은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더구나 24시간 운영된다고 하니 파격적이다.


지혜의 숲에 들어서면 높은 천장까지 가득한 책의 웅장함에 압도된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높이가 수 미터는 되는 책장 꼭대기에 꽂힌 책을 보니,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뭣 하러 책을 꽂아두며 혈세를 낭비하느냐는 누군가의 비판이 생각난다. 당시 조금 논란이 되긴 했지만 멋져 보이는 건 사실이다. 도서관측은 누군가 책장 꼭대기의 책을 원한다면 사다리를 타서라도 꺼내 주겠다고 하니 고맙고 또 아무렴 어떠랴. 손이 닿는 곳에 수북이 쌓인 책도 못 읽는 처지에. 책을 읽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 꽂혀 있든 뭔 상관이람.

책 좋아하는 사람 치고 책장에 꽂힌 책 다 읽은 사람을 못 봤다. 책 욕심에 읽을 시간도 없으면서 일단 사서 모으기 바쁘니까. 또 요즘은 책을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쓴다고 하니 지혜의 숲도 그냥 인테리어로 책을 사용했다고 생각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지혜의 숲이란 이름이 꽤나 탁월해 보인다. 지혜를 상징하는 책이, 가득한 곳이니 지혜의 숲이란 제목만큼 어울리는 게 있을까 싶다. 더구나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나무들로 빼곡한 숲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종이가 나무이기도 했으니까.

이런저런 흡족한 마음으로 책의 숲 속을 살피며 걸어 본다. 이 책들 중에 진짜 재미있는 책들이 보물처럼 숨어 있을 것이다.

평범함을 가장한 ‘재미있는’녀석을 찾아보기로 했다.


"넌 재미있니?"

"자신 있으면 읽어보시든지."

"이 새끼가……."


나도 제법 출판계 밥을 먹었는지 출판사 이름이 먼저 눈에 띈다. 지혜의 숲은 출판단지에 들어선 출판사들에게 도서를 기증받았는데 기증받은 도서의 책장에는 각각 출판사의 이름이 붙어 있다. 한 출판사의 책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서점에선 책의 이름이나 작가로 분류를 하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이제는 잘 알기에,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을 보며 그야말로 출판사의 산 역사이자 노력의 증거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렇게 좋은 책들을 만들었나요?"

"먹고 살려다 보니."

"그동안 돈 많이 버셨겠어요."

“많이는 뭐.”

“차도 바꾸신 것 같던데.”

"차 바꾼 지가 언젠데.”

“아 네…”

“이번에 건물 하나 올렸어..."


따뜻한 감성 따위 순식간에 사라지며 질투로 다른 출판사의 책을 집어 들었다. 출판사가 책을 만드는 곳이니 왠지 착할 것이라고 믿으면 오산이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학교로 한 아저씨가 찾아왔고 빈 교실에 책을 가득가득 쌓아놓곤 정가의 삼분의 일 가격으로 판다고 했다. 싼 가격에 여러 권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정신없이 책을 박스에 담았다. 들 수도 없을 만큼 가득 박스에 책을 담았는데 주로 만화로 된 책을 골랐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출판사의 재고를 학교 측에 양해를 얻어 판매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학교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한 시절이었으니까. 심지어 어린이가 보기에는 다소 수위가 높은 성인 소설들까지 있었던 걸 보면 아이들을 위해서 찾아왔다는 출판사 직원의 주장은 믿어주기가 힘들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책을 만드는 회사라고 늘 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건 절대 질투심에 불타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의도는 불순했을지 몰라도 그렇게 충동구매로 산 책들이 책에 흥미를 갖게 만든 자양분이 되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연쇄 살인과 성에 관련된 다소 무서운 정보를 조금 이른 나이에 얻었다는 게 안타깝지만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책으로 밥을 먹고 사니 비긴 걸로 하자.


수많은 책들 중 어느 한 권과 어느 독자의 만남을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하나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조금은 낯 뜨거운 비약이지만 실제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백 권씩 책들이 쏟아지고 쏟아지는 책들 중 한 권이 우여곡절 끝에 내 손에 들어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 같은 일이다. 펼쳐 든 책을 노력과 시간을 들여 읽기 시작하고 무탈하게 마지막 책장을 덮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렇게 읽은 책이 나의 삶에 작은 변화라도 가져온다면 그 책 한 권을 뽑아 든 순간은, 여전히 낯 뜨겁지만,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그런 기적은 매일 매 순간 서점과 도서관에서 일어나고 있다.


책 한 권을 고르며 이렇게나, 지나치게 많은 의미부여를 하고 있으니 이건 병이다. 직업병.


나의 운명을 바꿀 책은 대체 어디 숨어 있을까, 라는 허망한 망상에 빠져 지혜의 숲을 몇 시간 째 헤맨다. 집에 있는 책도 안 읽으면서 뭣 하러 여기까지 와서 책을 뒤지고 있는 건지, 전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

지혜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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