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도시

어느 해였던가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by 윤태진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고 있었다. 주인공 소녀는 원치 않지만 북한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북으로 조금 더 올라갔다간 두 번 다시 남으로 내려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함께 동행하였던 올케와 북한군의 감시를 피해 파주 언저리에서 가던 길을 벗어나 어디론가 숨어들었다. 그렇게 숨어든 곳이 바로 파주의 교하였다. 별생각 없이 읽던 책에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이 등장하니 반가웠다. 이건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이 TV에 나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더구나 소설에서 묘사하는 교하는 예로부터 양반이 살았던 동네라고 하니 뭐 못 사는 동네는 아니었구나 싶어 다행이다.

소설 속에서 소녀와 올케는 이곳 교하에 몸을 숨기고 전쟁의 폭풍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교하의 특징 중 하나가 높은 산이 없다는 건데 덕분에 군인들이 마땅히 몸을 숨길 곳이 없어 북한과의 치열한 전투가 없었던 곳이라고 한다. 실제 교하에는 눈에 띄는 높은 산이 없다. 있는 것이라곤 출판단지에 위치한 500미터 남짓의 심학산이 전부이니 실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에는 서로에게 불리한 곳이었을 것이다.

교하에 대한 설명과 함께 주인공 소녀와 올케가 개천에서 가재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하천이 이곳 어딘가에 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전히 교하 곳곳에 작은 하천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흔적만 겨우 남아 있는 정도다. 물도 생명체가 살기에는 너무 더러워 보인다. 그런데 가재를 잡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었다니 놀랍다. 지금은 맑은 물이라곤 수돗물이 전부다.


소녀와 올케가 우연히 파주의 교하에 머물게 된 것처럼 나 역시 느닷없이 파주에 머물게 되었다. 회사 때문이었지만 파주라니. 일산은 들어봤지만 그 옆에 파주라는 곳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발음조차 뭔가 구수한 파주. 조선시대 때는 수도로 거론될 만큼 잘 나갈 때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예전의 명성까지는 아닌 것 같다.


파주의 다른 동네는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출판단지를 비롯해 이 근방은 겨울이 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점심식사 시간과 퇴근시간을 빼면 길에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뜩이나 황량한 출판단지는 더욱 을씨년스럽게 변해버린다. 잎 떨어진 마른 가지가 바람에 휘청이고 겨우 붙어 있는 몇몇 잎사귀가 방정맞게 파닥거린다. 회색 빛 하늘 위로 낮게 날고 있는 기러기가 유난히도 커 보인다. 금방이라도 어둠에 휩싸일 것 같은 시간 출판단지는 마치 음산한 공포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마침 텅 빈 도로 위로 검은색 구형 소나타가 흰 연기를 뿜으며 지나간다. 혹시 저 차 안에 손발이 묶인 소녀가 뒷좌석에 던져져 있진 않을까? 으슥한 갈대샛강으로 끌려가 살해될 위기에 처해있으면 어쩌지? 이런 상상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다.


사실 이곳 출판단지는 이전에는 훨씬 더 조용한 곳이었다. 지금은 출판단지의 이색적인 건물들과 근처 아울렛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유동인구가 많아졌다. 커다란 관광버스도 자주 눈에 띈다. 그들의 목적이 아울렛인지 멋진 건물들을 보는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 같진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아울렛을 찾아온 것 같다.

가뜩이나 사무실에 앉아 하루 종일 책을 만드느라 바쁜 이들에게 아름다운 출판단지의 멋진 풍경은 사치일 뿐이다.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엉덩이 떼기도 쉽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건물이 아무리 예뻐도 밖에서 봐야 알지 안에 들어가 있으면 모른다. 앉아서 보이는 건 책상을 둘러싼 회색빛 파티션과 거기 붙어 있는 포스트잇, 일상을 잊는데 도움을 주는 연예인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어느 해였던가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텅 빈 도로와 이국적인 건물 위로 쌓인 눈이 금세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냈다. 하얀 도시. 이런 노래 제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눈이 쌓여가는 출판단지는 더욱더 조용하다. 실제로 눈이 오면 뭔가 더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쌓인 눈이 소리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출판단지는 더 아름답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오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의 첫 문장을 빌려 표현해 본다. '자유로의 긴 도로를 달려 빠져나오자 눈의 단지였다. 고요한 마음이 하얘졌다.'


난 사실 추위에 무척 약하다. 옷도 여러 겹 껴입고 없는 살림에 보일러도 아낌없이 튼다. 손발이 시려 글을 쓸 수 없다며 난방 버튼을 누른다. 그렇다고 늘 글만 쓰는 것도 아니면서. 조금씩 따뜻해지는 방의 온도에 비례해 마음이 조급해진다.

난방비가 많이 나오겠지? 그래도 어쩌랴. 추운걸.

급격한 온도 변화에 유난히도 예민한 코가 언제나 가장 먼저 반응하며 콧물을 흘려보낸다. 코가 헐 정도로 풀어도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르지 않는 샘물과 비견될만하다. 그렇게 잠잠하던 비염이 시작되며, 나의 겨울도 시작된다.

비염 약을 먹고 약기운에 취해 비몽사몽 글을 쓴다. 추운 겨울 보일러로 달궈진 방에 앉아 약 기운과 술기운에 취한 채 기분 좋게 글을 쓴다.

몇 해 전부터 경험하는 파주의 겨울은 유난히 더 춥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파주는 예전에 살았던 지역들보다 더 춥다. 부산보다 훨씬 더 춥고 광주보다도 춥고, 서울보다도 춥다. 바람을 막아줄 커다란 빌딩이 없어서인지 바람이 거침없다.

서울에서 눈곱만큼 북쪽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이 정도 거리가 온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버스로 삼십 분만 달리면 도착하는 곳인데 차이가 나면 얼마나 차이가 나겠냐고 생각했는데 파주는 언제나 서울보다 추웠다.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상청 사이트를 뒤져 확인해보았고, 진실은 명확했다. 약 2~3도가량 더 낮았다. 어제도 오늘도 다가올 일주일도 내내 서울보다 온도가 낮았다.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파주가 더 춥고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파주가 잘못한 건 없고 북쪽으로 올라온 내 잘못이다.

내복을 껴입는다. 이제 멋 낼 나이는 지났고 갑자기 옷 벗을 일이 생길 리 없는 아저씨니 내복도 괜찮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이제 겨울이 끝나간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 겨울의 잔인한 차가움을 견디고 견디다, 추위에 적응이 되려고 하면 어느새 또 봄이 슬며시 찾아온다. 이쯤 되면 허무함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눈치 없이 돌아온 봄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정든 겨울이 아쉽기도 하고. 또 이렇게 겨울이 가고 만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고단함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자연은 그저 그냥 넘어가는데 난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설마 나만 이렇게 힘들리는 없겠지 하고 가만히 생각하니 자연 역시 고단한 인고의 시간을 갖는다. 죽은 듯 숨죽이며 버틴 씨앗이 싹을 틔우느라 다시 죽을힘을 쏟는다. 죽을 만큼 힘들어 본 적 없는 나는 군말 없이 내복을 입고 보일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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