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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May 08. 2019

찬란한 파주의 봄

사랑은 사정없이 식어버렸다

출판단지 어딘가에서

  

  봄이 되면 출판단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벚꽃뿐만 아니라 곳곳으로 철쭉과 개나리, 이름 모를 온갖 꽃들이 변화를 알리기 시작한다. 자연과 어우러진 곳이라 계절을 맞이하는 변화가 꽤나 극적이다. 메마른 하천과 샛강에는 물이 차오르고, 출판단지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기러기도 어느새 사라졌다. 나무 위 사방으로 뻗은 그물 사이를 푸른 잎과 꽃이 메운다. 매섭던 바람 역시 기세를 잃고 산들거린다. 


  이런 싱그러운 봄이라니, 감성이 충만해진다. 


  어울리는 음악이라도 들어볼까 이어폰을 찾아보지만, 이런 한쪽이 고장이다. 겨우 들리는 한쪽마저 접촉 불량으로 들렸다 말았다를 반복한다. 때마침 2200번 버스의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이 들려온다. 우웅응. 

중년의 중후한 멋을 풍기며 걷고 싶지만 낭만이 말처럼 쉽지 않다. 분위기는 조금 깨졌지만 설레는 마음은 여전하기에 다시 출판단지 이곳저곳을 걷는다.


  사방이 분홍빛이다. 꽃향기를 맡으려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런 재채기가 나온다. 그것도 네 번 연속해서.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다. 비염 약이 가방에 있던가 없던가. 낭만과 콧물이라니, 슬프도록 간지러운 봄이다. 코도 마음도. 


  오래전 헤어진 여인과 술을 마셨던 적이 있다.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혹은 함께했던 시간이 아쉬워서 만났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었는지 역시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대부분의 헤어진 커플들이 헤어짐의 이유를 잊은 채, 행복했던 환상만을 떠올리며 다시 만나는 실수를 저지르듯 나 역시 그랬다. 그런 만남은 대부분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한다. 그나마 남아있던 환상까지 다 털어버리면 이제 달콤한 사랑의 추억은 사라지고 철없던 시절의 연애 기억만 남아 버린다. 그러리란 걸 알면서도 궁금하고 또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만나고 후회하고 씁쓸해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고. 


  분당에 위치한, 복층으로 된 독특한 구조의 한 술집 2층에 앉아 헤어진 그녀와 술잔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쌓여 가는 술병을 보며 한 때는, 그녀와 술을 즐겨 마셨었다는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배가 부른 맥주보다 소주를 좋아했고, 술에 취해선 평상시의 세련됨을 무장해제한 애교석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그녀의 버릇은 여전했고 나 역시 즐겁게 웃으며 옛 기억들을 소여물 되새김질하듯 끄집어냈다. 그렇게 기억은 뜨거웠던 사랑의 추억에 다다랐다. 


'지금 이 사람이 한 때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단 말이지?' 


시간이 지난 탓인지 아니면 이후 만났던 다른 여인들의 기억에 묻혀버려서인지 모르겠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상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버릴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한 때는 밤 잠 설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따위의 생각은 이미 촌스러움을 넘어 사전에 실릴 전설이 되어버린 요즘. 사랑은 사정없이 식어버렸고 그녀는 그냥 ‘지나쳐버릴 여자’가 되었다. 한 때 사랑했던 누군가가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사랑이란 거, 참 별거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존재가 여러 명이란 것이다. 그저 웃음만 나온다.


  최근의 영화, 소설, 드라마 속 이야기는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 모두 함께 해오던, 결혼은 해피엔딩이라던 전 인류적 거짓말을 폭로하고 있다. 결혼 후에 펼쳐진 진짜 인생을 보여주며 정신 바짝 차리라고 경고한다. 

  결혼은 비로소 시작이다. 미혼인 친구들의 흔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모험을 원한다면 결혼은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모험에는 많은 위험과 함정,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만큼의 성과도 있다. 그 성과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결혼'이 가진 미스터리 함이다. 

  이 글의 향방을 주의 깊게 엿보고 있는 아내를 위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쯤 해서 접는다. 


  역시 봄이 문제다. 꽃이 문제고 산들거리는 바람이 큰 문제다. 비염이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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