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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파주였을까?

“저희 여기 있답니다...”

by 윤태진


그래도 남들보다 책 좀 본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출판사라는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대학시절 전공서적을 줄기차게 내오던 출판사의 이름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저 책 제목이나 표지의 광고성 문구들만 읽을 줄 알았지 출판사까지 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출판계에 들어와 일을 해보니 비로소 출판사들의 이름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출판사들이 있었다니, 거짓말 같지만 등록되어 있는 출판사만 몇 만개란다. 김춘추 시인의 「꽃」에 이런 말이 있었지 아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출판사의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출판사들은 꽃이 되었다.

알고 보니 정말 다양한 출판사가 존재했다. 규모의 차이뿐 아니라 출판하는 책의 종류와 성격도 크게 달랐다. 수많은 책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듯 출판사들 역시 서로의 색깔이 분명했다. ‘책’이라는 특별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사명감을 갖고 책 만들기에 전념하는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전략적으로 저자를 선택하고 온갖 판매 노하우를 집대성해 판매를 위한 책을 만드는 곳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공통점은 어떤 출판사도 손쉽게, 아무렇게나 책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스트레스와 과중한 업무를 견디며 책 한 권, 한 권을 만들어내고 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동네에서 몇 년 있었다고 제법 아는 척할 정도는 된 것 같다.

아내에게 지식을 뽐내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책 한 권이 나오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알아?”

“대충 알 것 같은데 설명하고 싶으면 내일 알려줘.”


아내가 바쁘지만 않다면 내일은 반드시 알려줄 것이다.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을 볼 때마다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 저자는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편집자는 작가를 어르고 달래며 원고를 받았을 테고, 또 눈알이 빠지도록 오탈자를 잡았겠지? 제목과 표지를 선정하기 위해 수많은 회의를 거쳤을 것이고. 책은 좀 팔렸나 모르겠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이 책도 조용히 사라졌겠구나. 누군가는 또 어딘가에서 아쉬워하고 있겠지.

한 때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오래전 <굿바이 마이 프렌드>라는 영화가 결심의 자극이 되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암이었는지 백혈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을병에 걸린 친구와 우정을 나누다 끝내 친구를 하늘로 떠나보낸다는 조금은 뻔한 내용의 영화였다. 하지만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한적한 극장의 한 구석에 앉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같이 갔던 친구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할 정도로. 그 영화를 보고 나도 이렇게 슬픈 영화를 만들어 보리라 다짐하며 꽤 오랫동안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난 할리우드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무로는 더더욱 아닌 출판단지에 있다. 출판단지가 충무로나 할리우드보다 못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물 좋고 공기 좋다.

사실 출판단지가 파주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니 출판단지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파주와 출판단지는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뭐 상황이야 어쨌든, 출판단지는 오늘도 아름다운 모습을 뽐낸다. 문학이라는 예술을 다룬다는 자부심을 갖고.

파주에 출판단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대신 파주에 아울렛이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안다. 아울렛에 왔다가 주위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대체 여기는 어디람 하고 드디어 출판단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출판인의 한 사람으로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희 여기 있답니다...”


파주 한 구석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책과 뒹굴며 사느라 늘 분주하답니다,라고 외쳐보지만 역시 파주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적어도 30분 이상 열심히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파주일까? 하고 많은 도시 중에 왜 하필 파주?

비밀은 역시 땅값이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은 출판단지를 어디에 세워야 할지 고민했지만 비싼 땅값에 마땅히 찾아 들어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찾은 후보지가 처음에는 일산의 백석역 근처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양터미널이 위치해있는 곳이다. 하지만 당시 프로젝트 진행 중 땅값이 너무 올라 역시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그 대안으로 거론된 게 지금의 파주시 문발리다.(이제는 문발동이 되었다). 서울과 가깝고 자유로 옆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아 최종적으로 선정된 곳이었다. 당시 출판단지가 있던 자리의 땅을 군부대가 소유하고 있어 비어 있었던 것도 선택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뭐 어쨌든 출판단지라는 것을 만들게 된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물류비의 절감이었다고 한다. 출판사와 유통사, 서점이 떨어져 있으면 소모적으로 물류비가 많이 드는데 그 비용을 절감하자는 것이다. 덕분에 출판단지는 현재 250여 개의 출판사와 인쇄소, 유통사 등이 함께 자리를 잡았다.


한동안 출판단지는 꽤나 한적했다. 그런데 최근 조용히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제2출판단지가 만들어지고 출판사를 비롯해 영화사를 비롯한 각종 문화 기업들이 들어오고 있다. 오늘도 집채만 한 트럭들이 건축 자재를 싣고 도로 위를 달린다.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보는 것 같다. 또 어딘가 건물들이 들어서겠지.

한적해서 좋았던 이곳도 복잡해지는 중이다.

꿈꾸던 단순한 삶은 왠지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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