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책이 많았을 뿐이다
편집자 Y는 매일 아침 판매 부수를 확인한다. 컴퓨터를 켜고 부팅을 기다리며 커피 한잔을 내린다. 부장이 사둔 커피메이커를 보며, 한가하게 커피 내릴 시간이 어딨냐고 투덜거렸었지만 최근 들어 누구보다 즐겨 마시는 중이다. 사무실에 커피 향이 조금씩 차오르고 드디어 오늘의 전투를 위해 컴퓨터 전원을 누른다. 곧장 컴퓨터 모니터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바탕화면을 펼쳐 보인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매일 아침 버릇처럼 판매량 분석 페이지를 살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실눈을 뜨고 화투장 조이듯 엑셀 파일을 노려본다. 교보에서 10부, 영풍에서 5부, 알라딘에서 7부, 예스에서 4부. 이런 젠장 할. Y는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사무실엔 아무도 없다. Y는 총 26권이 나갔다는 판매 부수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나 기적은 없다고. 베스트셀러를 만들라는 사장의 밑도 끝도 없는 지시가 Y의 귓가에 맴돈다.
“최소 만부는 팔릴 것 같아. 느낌이 그래. 잘들 한번 팔아봐. 능력껏, 요령껏.”
출간되는 모든 책을 전 직원이 정독하여 독후감을 제출하라는 사장은 최근 사장놀이에 흠뻑 빠져있다. 이번에 만든 책 역시 훌륭한 책이라며 한껏 치켜세웠고 훌륭한 책은 어떻게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마련이라며 입소문이 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독려했다. 입소문이 뭐 그냥 나는 것도 아니고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건데 그 은밀한 짓이 쉬울 리가 있나. 헤어진 남자 친구랑 마지막으로 한 키스가 벌써 3년 전인 Y는 애타는 입으로 책 홍보나 하고 있으려니 뭔가 억울했다.
이래저래 심란한 아침이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갓 내린 커피를 홀짝인다. 후루룩후루룩.
선배가, 그 선배의 선배가 또 그 선배의 선배가 했다는 그 말이 떠오른다. 베스트셀러는 하늘이 내려준다고. Y는 대체 언제쯤 그 영험하다는 하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과연 자신에게도 그 기회가 오기는 하는 건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Y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에 깔아 둔 오늘의 운세 앱을 열어 84년생 쥐띠의 운세를 살폈다. ‘당신이 그리워하는 이성이 오늘 당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그렇다. 책 몇 권 더 팔아봐야 사장만 좋지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다. 더구나 나를 기다리는 이성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힘들게 만든 책이 안 팔려 회사에서 쫓겨났어요."
"잘 좀 팔지 그러셨어요."
"서른셋에 백수가 되었지만 절 사랑해줄 건가요?”
"책은 몇 권 사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책을 더욱 가열차게 팔아야겠다.
사실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하늘의 뜻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의 윙크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합 1위는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TOP10 정도는 거뜬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종합은커녕 분야 97위로 100위에 겨우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Y는 과연 누구의 잘 못이었는지 출간 과정을 복기해보았다. 편집의 잘못인지, 제목이 촌스러운 탓인지 디자인이 지저분한 표지 탓인지 마케터가 게을러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근본적으로 작가가 글을 못 써서 인지. 하지만 사실은 결국 다른 수많은 책에 밀렸을 뿐이다. 좋은 책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책이 많았을 뿐이다. 또 유명 연예인들이 스쳐 지나가듯 소개한 행운의 도서에 밀렸을 뿐이고, 유명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느닷없는 관심을 끄는 바람에 밀렸을 뿐이다. 수년간 책을 내지 않던 작가들이 경쟁하듯 책을 쏟아낸 것은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하늘의 뜻을 잘못 받아들여 적절하지 못한 타이밍에 책을 출간한 게 잘못일 뿐이다. 이런 절묘한 시기에, 그것도 재촉해서 책을 출간하게 시킨 사장이 결국 문제라면 문제였다. 자체적으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Y의 아침은 분노와 좌절 타협과 수긍 그리고 원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사 인트라넷을 열어 메일을 확인했다. 영업부 홍 부장이 대뜸 준비 중인 책의 제목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온다. 이벤트 경품을 만들기 어려운 제목이라는 게 이유인데 원래 하려던 ‘심연의 피아노’ 보다는 ‘심연의 하모니카’나 ‘심연의 멜로디언’ 정도가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멜로디언이나 하모니카를 경품으로 걸겠다면서. 농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경품 때문에 책 제목을 바꾸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경품 때문에 책이 팔리는 것도 사실이다. 뭐 이런 농담 같은 아침이 다 있지 라고 생각하며 Y는 지겹고 지루한 교정, 교열의 시간을 시작한다. 괜히 문장을 잘못 고쳤다간 작가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려 무척이나 피곤해지고 마니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세심하게 문장을 손보고 다듬는다.
“이상해 보여도 한 문장 한 문장 다 의미가 있으니 되도록 문장은 건들지 말아 주세요.”
“네 물론이죠.”
고쳐도 고쳐도 계속 고칠 게 나오는 작가의 문장을 보며 국문학과 졸업은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의심스럽다.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 터무니없는 문장은 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