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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Nov 29. 2019

깊이 알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완벽한 타인

허울 좋은 겉모습 속에는 치열한 발버둥이 있다

  

  책을 쓴 작가들과 종종 만날 기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작가의 글과 실제 모습이 너무 달라 그 괴리에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나도 모르는 사이 책 속의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 해온 것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이니 따뜻하지 않을까? 재미있고 웃긴 글을 써온 작가이니 유쾌하고 즐겁지 않을까? 이런 기대로 만난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때론 까칠하고 때론 차가웠다. 또 언제는 빛나는 후광 대신 피로와 마감에 찌든 현실의 작가와 마주할 때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옷을 입고 글을 쓸 때와 그 옷을 벗고 일상의 나로 돌아왔을 때는 같을 수가 없다. 회사에서 보던 동료를 밖에서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일 잘하고 멋져 보이던 동료와 상사들이 밖에서는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아줌마일 뿐이었다.


  실망의 경우가 아닌 반대로 무척이나 의외였던 작가들도 물론 있다. 무섭고 까칠할 것만 같은 그들은 미소가 밝고 따뜻했다. 전해지는 밝은 기운에 덩달아 신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내가 좋았던 작가들은 대가로 칭송받는 ‘위대한’ 작가가 아닌 소탈하고 겸손한 인간적인 모습의 작가들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진리를 알아간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재능보다 나은 것이 따뜻한 인간미라는 것을.


  어쨌든 이는 비단 작가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가수도 배우도 우리가 환상 속에 품고 있는 이들이 다 그 비밀의 대상이다. 너무 깊이 알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때로는 모르는 체 살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알 수 있어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호기심에 목숨을 거는 존재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그 대상을 깊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판도라의 상자가 괜히 열렸겠냐 말이다.

  또한 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지만 알 수밖에 없는 비밀의 순간도 적지 않다. 애인의 방귀 소리나 흠모했던 누군가의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 따위를 알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인생은 이렇게 딜레마의 연속이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그것이 상대를 위한 또 나를 위한 최선의 일이다.



* 자료 이미지는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이다. 깊이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치명적인 교훈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는 '코미디'를 가장한 일종의 '공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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