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태진 Dec 06. 2019

"작은 성의로 1억 정도 준비했는데..."

네버 렛 미 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거절

  부탁에는 요령이 있다. 실제로 부탁을 잘하는 사람은 좀처럼 거절하기 힘들게 만드는데, 나름의 기술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부탁 잘하는 방법, 거절당하지 않는 방법과 같은 기술서가 존재한다. 그런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우리 삶이 부탁할 일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실제 부탁과 거절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이다. 내가 피해를 보지 않으며, 동시에 상대와의 관계를 적절히 유지하며 '적당히' 부탁을 들어주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의 개인 능력차에 따라 때론 갈등이 생기기도, 또 때로는 끈끈한 우애가 생기기도 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여러 부탁을 하게 된다. 동료에게도 하게 되고 때론 회사 밖의 관계자들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 유난히 부탁할 일이 많은 나는 그래서 늘 긴장의 연속이다. 


  "이번 이벤트는 저희 단독으로는 힘들고 그쪽에서 지원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당분간은 힘들어요. 저희도 일이 많아요."


  "저기 이번 행사에 출연을 좀 부탁드려도..."

  "제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영화 <네버 렛 미 고>의 한 장면. 서로의 진실된 사랑을 증명하며 삶을 유예해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나를 보내지마』는 복제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모체가 되는 '근원자'를 위해 만들어진 그들은 역시 그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잠시라도 그 운명을 유예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들은 잔인한 비밀 앞에 서게 되지만 결국 차가운 거절을 당한다. 다시 말해 '목숨'을 거절당한 것이다. 이야기를 위한 극단적인 설정이지만 따지고 보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자식이 있어서 그런데 조금 더 일할 수는 없을까요."

  "요즘 회사 힘든 거 모르세요? 잘 챙겨드릴 테니까 나가주세요."


  현실의 나 역시 요즘은 하루하루가 거절의 반복이다. 물론 그들의 상황과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가만히 거절하지 못하는 제안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본다. 씁쓸하지만 아무래도 돈일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걱정이 돼도, 아무리 다른 일정이 있어도, 그들이 기대하는 이상의 돈을 준다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제는 이런 부탁은 거절하려고 해서요. 일정도 너무 바쁘고..."

  "많이 바쁘시겠지만 한 번만 더 고려를..."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는 꼭..."

  "많이 부족하겠지만 작은 성의로 1억 정도 준비했는데..."

  "네?!"

  "1억... 큰돈은 아니고. 요즘 다들 억억하길래... 그 정도 준비했습니다만..."

  "어디로 가면 된다고 하셨죠? 며칠인가요?"

  "그럼 이제 약속을 잡아볼까요?"


  나 같아도 일어날 것이다. 독감에 걸려 40도를 헤매는 상황일지라도 얼음을 씹어 먹으며 벌떡 일어날 것 같다.


  "아픈 거야 좀 나중에 아프면 되죠. 걱정 마세요 벌써 출발했습니다... 아 다음 주라고요. 미리 가 있죠 뭐. 마음 바뀌시기 전에."


  요 며칠 거절의 연속이라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느라 이런 글을 쓴다. 나 역시 돈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으니, 누군가의 부탁에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지는 말자고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귀찮으면 나도 어쩔 수 없겠지만.




* 자료 이미지는 소설 『나를 보내지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네버 렛 미 고>의 한 장면이다.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복제인간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지만 SF적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마음을 다소 많이 무겁게 만드는 소설이자 영화다. 

매거진의 이전글 깊이 알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