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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Mar 16. 2020

빠른 체념이 있어야 극복과 회복도 있다

터미널 - 그리고 대안은, 언제나 초안보다 났다

  하루하루 잘 살아보겠다고 최선을 다하고 사는데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 그 좌절감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부족하다. 


  일본과의 외교 갈등으로 인한 여행사의 위기나 바이러스로 사람들의 외부활동 자제 탓에 닥친 오프라인 매장들의 피해, 누군가의 음주운전 사고로 크게 다친 피해자, 직장 상사의 실수로 공동책임을 떠안게 된 부하직원 등 찾아보면 수많은 위기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마치 지뢰처럼. 운이 좋아 밟지 않으면 다행이고 그러다 밟으면 또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그저 운이 안 좋을 뿐이라고 자책한다. 


  

  어쩔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인한 피해와 위기는 마땅히 원망할 대상도 없다. 그러니 억울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말만 나오면 다행이다. 온갖 욕이 다 나온다. 그러다 죄 없는 주위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화를 내고 다투고 다시 패배하고. 쭈그러들고. 좌절의 연속이다. 


  다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밥은 누가 먹여주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영원한 약자이기에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툭툭 턴다고 털릴 리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군대에 있을 때는 사회에 있는 '어른 남자'들 모두가 존경의 대상이었다. 대체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까 라는 생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어느새 중년이 된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다들 이 무시무시한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거지? 누구 하나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누구 하나 힘들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 없다. 다들 어쩌면 그렇게 티를 안내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니 저절로 겸손해지며, 고개가 숙여진다.  

  또 그렇게 태연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거리의 모든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는다. 


  어쩔 수 없는 외부의 위기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그 해결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연례행사라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오. 또 왔어?"

  "요즘 조금 나태해 보여서."

  "너무 자주 오는 거 같은데."

  "그런가? 좀 덜 놀라는 거 같다. 시시하게."

  "가끔 와야 놀라지. 다음부터는 자제하고... 그래 오늘은 무슨 '위기'니?"


  빠른 체념이 있어야 극복과 회복도 있다. 그리고 늘 대안은 있다. 그리고 그 '탁월한' 대안은 언제나 초안보다 나았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 상단과 본문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나보스키는 자신의 나라가 쿠데타로 인해 일시적으로 '유령 국가'가 되어버린 초유의 사태를 겪는다. 그로 인해 공항 터미널에 갇혀 버리는데 그는 상황에 대한 불만 대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뛰어난 적응력(?)으로 터미널을 제 집처럼 나름(?) 즐겁고 유쾌하게 지낸다. 심지어 연애까지 해가면서. 

  역시 인생은 좌절할 시간이 없다. 늘 행복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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