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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Oct 13. 2020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일해야 할 때

밤쉘 - 그리고 그 사람이 더럽게 고집스러울 때

  누군가 대화를 하다 보면 의견 충돌이 날 때가 있다. 그때는 서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정확한 답이 없다면 서로 타협점을 찾아 절충하거나 혹은 누군가 양보해야 한다. 

그런데 쉽게 말한 이 타협과 절충, 양보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오히려 사생결단 전쟁이 일어나기가 훨씬 쉽다. 여기에는 고집과 아집, 자존심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남한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민족 아닌가. 


  좀처럼 타협이 되지 않는 일이 생기고 나면 비로소 누군가 나이와 권위, 직위를 드러낸다. ‘갑’과 ‘을’의 관계가 생기는 거다. 보통 직장상사와의 관계이거나 선후배, 부모와 자식 때론 부부 관계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갑’은 현명한 결정이라 생각하고 명령하지만 받아들이는 ‘을’은 그저 갑의 아집과 고집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 말이다.


  어쨌든 을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갑의 그 견고한 고집과 아집을 마주하며 커다란 좌절을 느끼고 차라리 내가 틀리길 바라며 모든 것을 내려놓지만 그 허탈함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나 역시 빈번히 그런 답답함과 좌절감을 느끼지만 뚜렷한 해결 방법은 없다. 혹시 인터넷에 적당한 해결책이 없는지 이리저리 찾아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피해자들의 한탄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문어를 떠올리는 거다. 물컹하고 흐느적거리는 문어.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아무렇게 늘어지며 끈적거리는 문어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문어를 비하하는 건 아니다.) 내 앞의 저 생명체는 문어다. 그러니 그냥 포기하자. 문어에게 대체 뭘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문어는 비싸기라도 하니, 상대를 향한 최소한의 배려다. 오징어가 아닌 게 어딘가. 물론 생긴 건 문어보다 못할 수도 있다. 혹은 오징어보다 더.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나 역시 어느 순간은 '갑'이 되어 누군가를 억압할 수 있다는 생각. 먹기 싫어도 나이는 먹을 것이고 조직에서 하찮은 권위 따위가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미안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러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적어도 나는 겸손함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문뜩 떠오른 영화 <밤쉘>.

  사진은 영화 <밤쉘>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갑에게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또한 갑의 권력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핍진하게 느끼게 해준다.

  하여튼, 늘 그렇지만 인간이 문제다. 인간이. 


* 상단 이미지는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한 장면. 여기는 문어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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