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라디오에서 영화에 대한 소개가 나왔다. 흥미로웠고, 마침 근처 주유소에 들러야 했고 그곳에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주유 후 세차를 해야 했기에 자동세차기 안에 들어간 짧은 시간에 찾은 영화를 플레이해 보았다. 그리고 처음 몇 장면의 분위기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주유소 구석에 차를 세워둔 채, 차에 앉아 20년이 지난 영화를 단숨에 다 보았다.
흔히 왕가위 영화의 미장센을 높게 평가하는데 역시 오래전 영화임에도 영화는 전반적으로 아름다웠고 감각적이었다. 한창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봤을 때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감정이 이해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는 게 많아지긴 했다. 꼭 좋은 것들만 배운 건 아니지만.
정확히 어떤 것이 나를 몰입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야기와 편집은 썩 유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투박하고 불친절했지만, 도리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장만옥, 양조위라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두 배우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던 것일까? 그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과 각적인 배경에 빠져 시선을 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들의 절제된 사랑, 애틋함에 감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설적이고 강렬한 감각과 감정에 빠져있는 우리의 일상에서 절제되고 은밀한,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미완성의 감각들이 오히려 신선했다.
영화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화연연화(花樣年華)라니 말이다. 찬란했던 시절을 돌아본다는 의미인데, 왠지 서글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앞으로 그 찬란했던 시절만큼의 절정은 없을 것이란 인정인 것 같아서다. 또 화양연화라는 시기가 스치듯 지나가는 ‘찰나’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영화 속 두 연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화양연화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아름답다. 겉모습뿐 아니라 당시의 모습 또한 아름답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사랑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 서로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그 사실을 비밀스럽게 공유한 남녀는 그들만의 절제된 사랑을 시작한다. 첸과 차우는 서로의 배우자와 같은 저급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각자의 감정을 억제하지만 사랑이란 게 어디 이성적으로 통제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불같은 사랑, 금지된 사랑, 절제된 사랑,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갖가지 사랑 따위의 애틋하고 뜨거운 감정들은 딱 그 시절에 한정된다. 젊음과 어우러진 그때 그 시절.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내가 그런 사랑을 그리워하고 부러워하고 애틋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이다. 애틋하고 그립다. 나에게도 젊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하지 못하니 그냥 생각만 한다. 뭐 생각으로 뭔들 못하리.
영화 속 두 연인의 이별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절절히 느껴지고, 당장 달려가 사랑을 쟁취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영화에 한껏 감정이입 한 상태라 주책이다. 하지만 완성된 사랑이 아닌, 미완으로 그친 사랑이기에 그래서 영화 화양연화는 더 의미를 갖는다. 화려했던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화양연화라는 단어가 완성되듯 말이다. 만약 둘의 사랑이 이뤄졌다면, 그래서 연인이 되어 더 깊은 사랑을 하고 또 그러다 결혼을 했다면? 애를 낳고 일상의 치열함에 찌들어가는 과정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화양연화가 아닌 ‘시련의 서막’이나 ‘불행의 전주곡’ 쯤으로 제목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역시 영화는 영화다워야 제맛이다.
나의 화양연화를 돌이켜본다. 얼핏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왠지 미소가 지어지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또 모른다. 아직 더 화려한 순간이 남아 있을지도. 더 행복하고 화려한 나의 그날을 기대한다. 늘 말하지만 생각이야 뭐 아무렴 어떠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