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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Jun 02. 2021

내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 2

어른이 되어 나는 내 만화가 고맙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된 사회생활에서 만화를 그린다는 여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9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 구도심과 산동네, 사창가까지 있었던 동네의 파출소장, 인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던 수도권의 한 경찰서에 이르기까지 20대의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릴 시간도 없었지만, 그당시 20대 초급간부였기에 나이보다 더 나이들어 보여야한다는 분위기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고, 만화라는 것이 지금과는 다른 평가를 받던 시절이기에 나의 스케치북은 항상 덮여있었다.


2001년 나는 운좋게 경찰청으로 전출을 받았고, 어찌보면 경찰서보다 약간 기업같고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라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상사나 동료들에게 호감을 갖게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도 많아, 사무실 내 과장님이나 동료에 대한 풍자 만화는 서로 킬킬대며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줄 수 있는 소재가 되었는데, 예전처럼 책을 만들어 그린다기보단, 포스트잇 같은 메모지에 단발성으로 그렸지만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엄했던 과장님(金) 밑에서 승진시험 준비와 업무로 지친 후배(朴)
과장님 모시고 단독 수행 미국 출장에 재수없게(?) 걸린 후배를 놀리는 만화. 그 후배도 이젠 서울 어느 경찰서의 고참 과장이 되었다.


결혼 후, 나는 아내와 메신저로 만화를 종종 그렸다. 아내와 싸웠을때도, 미안할때도, 비꼴때도 그렸던 조각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0년이 넘어버린 그림이지만 지금도 보면 피식하고 웃는다.


맨날 나(TJ)와 아들(가온)을 달달볶아서, 나중에 며느리감은 절대 아내와 같은 부산 출신은 허락할 수 없다고 했을때(실제로는 부산 여자들 정말 착하고 성격도 좋다 ^^)
아내가 만든 꽃게탕이 맛있어 칭찬했다가, 그날 너무 피곤한지 코를 고는 아내에 아들과 괴로워하는 모습


외교부로 전직하고 해외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살아보는 낯선 환경에다 초년 부부의 미숙함으로 다툼이 있을때, 가끔은 만화로 편지를 쓰기도하고 그림을 남기고 출근하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면 감정도 눈녹듯이 녹았다.


아내(결혼 후 기미가 많이 생겨 '깨순이'라고 부름)가 첫 해외근무지인 포르투갈에 정착하고 서로가 힘들어 다투는 일이 많았는데, 만화 편지는 그를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부싸움 후 소파에서 날 밤을 새고 난 다음 날 풍경


싸울 때만 만화를 그리는 건 아니고, 가끔 애잔하고 미안한 마음도 만화로 표현한다.


그러다보니 아내도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답장으로 만화를 달아놓는다. 한 컷의 만화는 백 장의 글보다 나은 것 같다.


아이가 중2가 된 지금, 거의 깡패가 다 된 아내의 모습(욕도 한 번에 두개씩한다- 씨0+임0씨팔마). 나중에 늙어서 보면 추억이될 것 같다.



글씨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못쓰는 것처럼, 학창시절 예쁘게 잘 그렸던 것 만큼 만화를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순간순간 아내와 아들과 만들어가는 만화는 추억의 저장소가 되가고 있다. 내 만화를 보고 웃던 형과 친구들은 이제 아내와 아들이 웃어주고 있다. 그래서 못 그리는 그림이라도, 나는 내 만화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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