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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Aug 07. 2021

대사관에서 만난 사람들 1

Dr.Pereira 명예영사-"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에 근무하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지위와 신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주 다른 환경과 문화를 가진 이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고, 공식적이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보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다.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른 고위직 외교관들도 많이 기록했을테니, 나는 사람 냄새가 났던 그들에 대한 글을 남겨보고 싶다.*  



요즘 미니멀 라이프라고 하는데, 컴퓨터에 쌓여있는 파일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난다. 정리의 기본은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주말에 틈나는대로 컴퓨터 파일을 지우고 정리한다. 97년부터 담겨진 갖가지 문서, 사진 파일들을 보고 지워나가다보면 아 이랬었지... 하는 기억도 있고, 엇! 맞아 이 양반은 어떻게 지내시지? 하고 잠시 눈을 감는 경우도 있다. 지나고나면 추억이라더니... 그것은 분명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 나는 여느때처럼 파일을 지워나가다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아... 이 분... 키보드를 멈췄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의 근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문득, 예전에 썼던 10여년 전 블로그를 뒤져보았다. 

Pereira 명예영사의 사무실에서(2009.12.6)


대사관에서 영사업무를 하다보면, 한정된 인원으로 주재국 내의 모든 외교업무나 사건사고를 커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나라의 유력인사들을 명예영사로 위촉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일부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현지에 그 존재만으로커다란 지원군이 되어준다. 


말 그대로 무보수임에도 그들의 헌신과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하며, 자신을 임명해준 국가가 최빈국일지라도 명예영사는 물적, 심적 정성을 다해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명예영사단을 꾸릴만큼 많은 명예영사들이 활동하고 있다(아래 관련 기사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40419/62878388/1



내가 포르투갈에 부임하여 첫 재외공관 생활을 시작했을 때 담당했던 업무가 영사였고, 명예영사는 제2의 도시 Porto에 있는 Dr.Pereira라는 분이셨다. 영사로서 명예영사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기에 나는 부임한지 3개월이 지난 12월초 어느 겨울 그를 방문하고자 출장 약속을 잡았다. 


떠나기 전, 직원들에게 어떤 분이냐고 물어보니 모두 나이가 1935년생인 고령이고 약간 치매기도 있기때문에 더 이상 계속 위촉하기 보다, 이번에 가서 이젠 그만 두시라고 해야할 것이라고들 했다. 말 그대로 첫 출장이 사표받으러 가는 꼴이 되었다. 이런.... 


하긴, 내가 부임했던 2009년만해도 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아직 많았고 보수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적당히 말씀드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Porto행 기차에 올랐다. 


리스본에서 출발하며 전화를 다시한 번 드리니, Dr.Pereira는 역 앞에서 기다리겠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통일호같은 열차를 타고가며, 아 초면인데 가서 무슨 말로 계속 이어나가지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3시간이 지나 Porto에 도착했다. 


"Boa tarde!(영어로 Good afternoon!)"

그는 나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하니까 이 동네 한국이나 동양사람이 별로 되지도 않고, 자신은 한국 사람들을 많이 봐와서 잘 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시간에 도착한다고 나한테 전화한 동양인이라고 범위를 좁히면 너 밖에 더 있겠어? 하면서 껄껄 웃었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외모의 그는 70이 넘은 나이임에도 손수 자신의 차를 가지고 나와, 나를 태우고 Porto 시내를 구경시켜주었다. 다만, 관광온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가시나해서 행선지를 물어보니 점심을 하기 전에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주겠다며 시내 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

한 건물의 2층에 올라가 문을 연 그의 사무실에는 태극기와 한국에서 가져온 듯한 장식물, 그리고 그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이 있었다. 이 먼 곳에 태극기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와, 영사님, 태극기 앞에서 좀 찍으께요."

"zzik-o(찍어 ㅋㅋㅋ)"

그의 사무실 방문은 이렇게 유쾌하게 시작됬고, 그의 한국에 대한 인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1935년 Porto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언론을 통해 한국 전쟁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동차 판매와 여행업 등의 견실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당시 공포에 쫓기던 한국인 부부를 보호해주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되었다고 한다. 


이후 1975년경 Porto 항구 앞에서 한국의 자동차를 선적하고 가던 화물선이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국인들이 Porto시내 임시 거처에서 지내게되자 관련 기사를 본 Dr.Pereira는 그들을 직접 찾아 한국으로 떠날 때까지 정성껏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주포르투갈한국대사관이 개설된 시점도 1975년이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1981년부터 주포르투갈대한민국 명예영사로 위촉되고 수십년간 자리를 유지하며, 폭넓은 정/관/재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 교민과 여행객에 대한 보호, 우리 지상사 진출 지원 등 많은 일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노인장께서 오래된 기억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 부정확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는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nineteen seventy-five, 1975년)"를 몇 번씩 연발하면서 그때의 감성에 젖어 성심껏 설명해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약간의 치매 초기셔서 그런지 그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시는 내용은 방문 내내 반복됬다. 


사무실을 나와 점심을 하러 차에 탔는데도 또...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ㅠㅠ, 식당에 도착해 차에 내려 들어가는데도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메뉴를 시키고 기다리는데도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다 먹고 디저트 시키는데도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물론 그것만 빼면 다른 대화는 모두 정상적이어서 문제는 없었고,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 웃어넘겼다. 


명예영사단만 출입할 수 있다는 클럽에서 점심을 마치고 다음 일정으로 가봐야겠다고 하자 그는 매우 섭섭해하면서 시내 구경 다 시켜줄테니 더 있다가라고 몇번을 얘기했다. 시골 할아버지처럼... 그래서 다음에 꼭 다시 휴가를 내서라도 찾아뵙겠다고 하니, 그는 잠깐 생각하고 답했다.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 아... 영사님 됬구요..."



첫 Porto 일정은 그의 환대로 기분좋게, 그리고 포르투갈의 정을 느끼며 돌아왔다. 사무실로 복귀한 뒤 그의 기록을 뒤져보니 그는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없을 때부터 정말 많은 일을 한 분이었다. 그런 그를 노쇠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예영사에서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매몰찬 것 같아, 나는 그 직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후 업무를 하다가 좀 막히는 일이 있으면 리스본에 사는 그의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한국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로도 가끔 그의 근황을 들었는데 건강이 점점 않좋아지신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크리스마스 휴가철에 인사차 전화를 드리니 자신은 아직도 건강하다며, 만약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지원할만큼 건재하니 걱정말라고 답했다. 내가 웃으면서 "근데 한국이 멀어서 가실 수 있겠어요?"라고 하자, Dr.Pereira 영사는 잠시 정적하시더니...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 아... " 


나는 뵌지 얼마 안됬는데 벌써 깜빡했네.. 하고 머리를 때렸다.




다음해 연초, 대사관에서 포르투갈 국회의원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Dr.Pereira 영사는 따님과 함께 Porto에서 참석해주셨다. 뵌지 한 두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건강이 좀 안되보였다. 


따님은 "장거리 움직이시면 안되는데, 굳이 오시겠다고 하셔서 제가 모시고 왔어요... 하여간..."라고 말했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해서 많은 역할을 해주었다.

한-포르투갈 의원친선협회 행사에서. 왼쪽에서 세번째가 88서울올림픽 여자마라톤 우승자 Rosa Motta, 오른쪽에서 세번째와 두번째가 Dr.Pereira 영사 부녀, 그리고 나

 

행사 다음 날 출근해보니 총무과 직원이 Dr. Pereira 영사가 어제 Porto에서 오시면서 직원들에게 집에서 담근 빈티지 와인 10병을 가져왔다며, "박영사님 꺼는 이걸로 주랬어요" 하면서 봉투에 담은 와인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와인이 유명한 포르투갈에서는, 우리가 과실주를 담가먹듯이, 집에서 적당한 병에 와인을 담고 병에 투박하게 밀봉 연도를 적어놓는데, 가져온 다른 와인들을 보니 역시나 집에서 찍은 듯한 2000년도 말고는 특별한 표시가 없는 평범한 와인병에 담긴 것들이었다. 


나는 봉투를 뜯지않고 집에와 주말에 여유있을때나 먹어야지... 하고 창고에 두었는데, 이후 주말에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여유가 없어 와인을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고, 창고에서 본의아니게 몇 년 더 숙성하게 되었다. 


이후, Dr. Pereira 영사는 거동이 불편해질 만큼 병세가 악화되어 전화 연락도 할 수 없게 되었고, 2012년초 내가 포르투갈을 떠난 후 몇 달있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에서 생활하던 어느날 갑자기 그 와인이 생각나서 창고를 한참 뒤졌고, 결국 와인봉투를 찾았다. 


야... 받았을때부터 거의 3년이 됬으니 2000년 밀봉했으면 벌써 13년은 됬겠네.. 하고 열었는데, 와인병에 찍힌 연도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1975년에 밀봉된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던,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였던 것이었다. 


그 안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만한 크기에 작은 편지도 들어있었다. 


'박영사, 내가 자꾸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하니까 짜증나죠?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 그 해를 까먹는 거 같아 그랬어요. (아내에게도 그런답니다). 요즘들어 건강이 좋지않아, 어쩌면 당신이 내가 명예영사로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영사일 것 같네요. 한국대사관의 명예영사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나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그럴껍니다.   


From. 주포르투갈대한민국명예영사 

Antonio Devesa de Sa Pereira' 



아... 좀 일찍 꺼내볼 것을... 나는 한동안 책상에 와인병과 그의 편지를 올려놓고 말을 잃었다. 


사람들은 포르투하면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소설의 영감을 얻은 도시로 기억하지만,

나는 Pereira 영사의 1975년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Pereira 명예영사와 Porto 시청사 앞에서(2009.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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