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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May 08. 2021

과거로 이메일 써보기 2

과거로부터의 답장은 현재를 더 소중하게 한다

반타작.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내가 보낸 메일 6개중 답장이 돌아온 것은 4개였다.


맨 처음으로 답장을 보내온 친구놈은 답장을 받고나서 보니

반갑긴한데 'TV는 사랑을 싣고'처럼 공개적으로 만났다간

어두운 과거(?)가 다 들통나겠단 생각이들었다.



두번째로 회신 온 선배는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옆에서'에서 나온 듯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같은 편지를 보내주었다.


확실히 1년만에 연락을 해도 메일만봐도 흥분한 얼굴과 입이 떠오를 정도로

욕으로 시작해서(야 이 개**야, 왜 인제 연락해 임*, 죽을래? 하여간 반갑다...)

욕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생각해보니 더 열받네, 이 **야... 연락안하면 죽인댔지? 야 이...)

욕으로 끝나는(야 임* 그래도 내가 너 정신없이 조아하는 거 알지-흥분해서 맞춤법도 틀려)

걸쭉한 남자 선배들과의 글과는 좀 달랐다.



세번째로 회신을 주신 국장님도 예전처럼 다정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여권과장님에게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수신 여부를 보니 확인도 안된 것으로 나왔다.

아, 그 10년도 안되는 사이, 이제는 추억으로 묻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태어났던 아들 놈이 이제는 중학생이 되어서

저렇게 공부도 안하고 맨날 지엄마한테 욕먹는 게 일입니다..

라고 하려고 했는데.

뭐라해야 그 아쉬움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외교부 인턴 사업 담당할 때 취업이 됬다고 메일을 보내오며

'저의 30대가 기대된답니다'라고 했던 그 학생은

이제 그 30대를 지났을텐데

그도 역시 메일을 바꾼 것인지 수신 확인도 되지 않았다.

그래 그 기대한다던 30대를 잘 보내고 세상 어느 한 켠에서 잘 살아가겠지.



거기서 나의 과거로의 메일들은 끝난 줄 알았는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메일이 날라왔다.

내 첫 해외공관 근무지였던 포르투갈에서 였다.


2009년 8월. 나는 첫 해외공관이자 여행이나 출장이 아닌 첫 해외 생활을 포르투갈에서 시작했다.

서른 여섯의 나이. 이제 갓 돌을 지난 아들과 아내를 한국에 남겨두고, 인천을 출발해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 16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던, 설레이는 감정보다 두려움이 앞섰던 시절이었다.


업무는 물론 현지 생활에 적응하고 집도 구해야하는 초창기, 안 그래도 낯설은데 해외에서 개인주의라고 설명하는 게 맞을런지 모르지만 점심도 혼자 먹고, 아침 저녁도 혼자 해결해야했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그당시 포르투갈은 한국 식당은 커녕 한국 수퍼도 없어, 기껏해야 주말에 우범지대에 있던 중국 수퍼에 가서 쌀을 사고 한 종류 밖에 없는 라면이나 사와야 했었다. 물 다르고 공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보다 당장 먹는 것부터 맞지않았지만, 어디 누구한테 얘기할 데도 없었다.



대사관 리셉션에 근무하던 그녀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직원이었는데, 친절하면서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부임한지 얼마안된 나와 목례나 나누는 수준이었다. 약간 복스럽게 생긴 그녀는 무뚝뚝하면서도 뭔가 물어보면 항상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 나에게 그녀가 나를 부르더니 검은 비닐 종지에 뭔가를 싸서 주었다.

뭐지? 하고 보니... 그것은 '김치'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포르투갈 사람이 나에게 김치를 싸주다니.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한국대사관에서 오래 근무해서 그런가 한국 음식 매니아였다.

그때 대사관 직원들은 독일이나 스페인에 있는 한국 수퍼에 국제운송으로 한국 식품들을 주문했는데

(당시 300유로 이상이면 운송비가 무료여서 몇 명이 모여서 같이 주문했다)

그녀는 주문을 가장 많이 직원 중 하나였다.

특히 너구리나 오징어 짬뽕 라면을 받으면, 너무 행복해하며 "무이뚜 봉(muito bom, very good의 뜻)!"을 연발하며 퇴근시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그녀는 나 같은 사람들이 처음오면 먹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할텐데

'특히 한국 사람은 김치 아냐?' 하면서,

자신은 종종 중국 수퍼에서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해먹는데 먹어보라고 주었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김치가 꽤 맛있게 담근 걸보고 깜짝 놀라며

다음 날 락앤락 통에 베이컨을 구워 넣어 돌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포르투갈 생활 초기, 아내가 보내 준 한국 반찬을 받고 사무실에서 창문 열어놓고 혼자 식사하는 모습(2009.9월)


대부분의 내가 경험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내가 근무했던 2년 반 동안 참 따듯하게 친절하게 때로는 누나같이 도와주었고

대사관에 들어설때면 항상 집에 온 것처럼 반가운 인사를 해주었었다.


그런 그녀가 설날인 2.1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연하장과 함께 답장을 보내왔다.

늦게 답장해 미안하면서도 너무 반갑고, 포르투갈에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달라는

I am still here and you can absolutely count on me 라는 말.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오면 좋겠지만, 자신의 퇴직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라는 말까지.


이제껏 받아본 어느 연하장보다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글이었다.

여권과장님의 답장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다시 채워주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며 수도 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이별을 할 때, 우리가 자주 하는 말

"다음에 또 보자."


하지만 나이 오십이 가까워지자 점점 깨닫게 되었다.

헤어지면 다시 볼 일은 거의 없다는 것. 우리 인생에.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우정, 신의, 사랑도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이번에 여섯명에게 보낸 메일 중 네 통의 답장을 받았지만

다시 세월이 가면 그 중의 절반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또, 이번에 받은 네 통의 메일을 받으면서 느낀 것은

반갑고 또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이 현재에 큰 다름을 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때의 기억을 뒤로 한 채

마음 한 켠은 뿌듯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현재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서 과거로 이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받으면서,

나는 더 현재를, 그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감사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세월이 가면.   




https://www.youtube.com/watch?v=50GFeIvs69k

1988년 가을, 중3의 까까머리로 친구들 앞에서 목청껏 '세월이 가면'을 불렀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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