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고 화창하지도 않아도 달리는 것만으로도 좋아
스무 살이 넘어 성년이 되니 목욕 후 시원한 맛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 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목욕탕 가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때밀이를 받는 게 생각보다 괜찮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등산처럼 땀도 많이 나고 몸이 아주 피곤한 날엔 때밀이 아저씨의 손길이 그리워 목욕탕으로 달려가곤 했다.
몇 년 전 7시간의 산행 후 땀이 범벅이 돼서 하산 후 목욕탕에 들려 때밀이를 받게 되었는데, 시원한 건 좋은데 문제는 때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었다. 한 5분이 지나도... 미안해서 세신사 아저씨에게 "아저씨 죄송해요..."라고 하니 "에이 내 직업인데요 뭘"하고 쿨하게 넘어가셨다. 근데 또 5분이 지났는데도 계속 나와 "정말 죄송해요..."라고 하니 인상이 굳은 상태로 대답을 안 하셨다. 아저씨가 꼭
"(밀어도 계속 나오니) 너 지우개냐?"
라고 할 것 같아 먼저 달래드릴 겸 말을 걸었다.
"아저씨, 여기 남탕이고 다들 벗었는데 왜 팬티를 입고 세신을 하세요?"
"아, 직업 이어서요" "손님에 대한 예의죠."
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커서요."
"네?"
아저씨는 나훈아 형님 같은 표정을 짓더니
"보여줘요?"
"아뇨. 됐습니다."
살다 보면 이렇게 의외의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의 단독 여행 선언에 아내는 간단히 대답했다.
"누구랑 가는데?"
"**씨하고 같이 간다."
학교 다닐 때 늦게까지 술 먹고 딴짓하려면 엄마한테 가장 착실한 친구하고 같이 있다고 안심시킨 듯 아내가 익히 아는 사무실 직원 얘기를 꺼냈다.
"주말만? 밥 안 싸줘도 되제? 잘 갔다 온나."
흐엉? 나도 모르게 손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뭐지? 화난 건지 이해해주는 건지 무관심인지 알 수 없는 이 부산 여인네의 반응은? 멋쩍게 출근하면서 혹시 열 받게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전에 부부 싸움하고 큰소리치고 "오늘 안 들어온다!" 하고 집을 뛰쳐나간 뒤, 혹시 아내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하며 계속 카톡을 보는 심정이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던 것 같다. 아내가 등산도 캠핑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최근 들어 나를 안되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건 아줌마 친구들도 많이 생겼으니...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백일섭 아저씨는 졸혼도 한다는데 이게 뭐~ 나는 지난해 인란드바난의 길을 함께한 총각 **씨를 설득해 이번에도 같이 가기로 했다.
주말이고 한 군데만 갔다 오는 일정이라 계획을 짜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3주 정도가 걸렸다. 미국으로 치면 서부와 같은 미개척지 같은 이미지의 스웨덴 북부. '나무의 바다'라고 할 만큼 숲이 많고 이제껏 가보지 못한 주(state)인 Västernorrlands주를 가본다는 생각에 3주가 금방 지나갔다.
3주 동안 아내와는 냉전도 아니었고 평범한 일상처럼 지냈다. 아내는 그냥 내가 목욕 갔다 오는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고, 나도 이번엔 정말 휴식 같은 휴식을 해보자는 생각에 크게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한때는 "여행은 계획 세울 때가 더 재밌어!"라고 하고 거의 시간 단위로 계획을 짰던 내가, 굳이 동생 같은 동료 직원과 둘이 가는데 그렇게 짤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에 다시 무계획 같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출발하는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전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발한 것도 아니고 천천히 일어나 7시쯤 슬슬 출발했다. 아내에겐 "이제야 진정한 여행을 떠나는 거 같다"라고 우렁찬 소리로 씩씩하게 말하고 나왔다. 홀가분하긴 한데 사실 뭔지 모를 해방감과 찝찝함이 들었다.
차는 북쪽으로 달렸다. **씨와 사무실에 하지 못했던 얘기도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한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긴장과 스트레스로 싸였던 지난 세 달 동안 대사님도 바뀌고 새로운 대사님도 무사히 도착하셨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냥 이렇게 비 내리고 화창하지도 않은 고속도로를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새 Höga Kusten의 입구이자 스웨덴에서 가장 긴(1,867m) 현수교인 Högakustenbron(영어로 High Coast Bridge)에 도달하였다. 건너자마자 쉴 겸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옆 있는 Höga Kusten이 시작되는 Hornön 호텔에 들려 커피 한 잔도 하고 정보안내소도 들렸다. 유명 관광지라 그런가 무료 자료가 엄청 많아 커피값을 뽑고도 남았다. 전망도 탁 트여 마음도 탁 트였다.
이제 첫 목적지인 Naturum Höga Kusten은 40분 정도만 가면 되고, 오후 1시 반 정도 도착할 테니 시간은 얼추 잘 맞춘 듯싶었다. 그런데, 교대로 운전대를 잡은 **씨가 출발한 지 한 5분 정도 돼서
"참사관님, 바로 가지 말고 오른쪽에 길이 예쁜 거 같은데 잠깐 들렀다 가면 어떨까요?"
"그래.....? 시간이 좀 그렇지 않나? 뭐... 그러지 뭐"
나는 지금 바로 가도 점심 먹고 돌아가면 빠듯할 텐데 뭘 돌아가나... 하고 좀 불만은 있었지만,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다. 다만, 이후에 얼추 생각했던 일정들이 뒤로 밀리면 대충 생각했던 일정대로 다 못 볼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렇다고 정색하기도 뭐하고 또 사무실도 아닌데 꼰대 아니냐는 오해도 살 것 같아, 마지못해 불만 섞인 채로 오른쪽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