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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Oct 03. 2021

마누라 속이기 season2-3

누군가의 다름을 인정하고 정리하며 포기하는 것, 그것이 인생

중학교 친구 중에 특이한 놈이 있었다. 어느 날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자유롭게 그리라고 했는데 이놈이 스케치북에 계속 검은색만 가득 색칠하는 것이었다. 난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야... 뭐 그리는 거냐?"


"김"


뭐 이런 게 다 있지.. 이런 게 친구라니. 쯧. 선생님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질 생각을 하니 불쌍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놈은 선생님한테 매우 칭찬을 받았다. 선생님은 자신이 미대에서 추상화를 전공했는데 중학생 수준에서 이 정도 구상하는 것은 천재에 가깝다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칭찬했다. 


교실에는 선생과 그의 수제자로 구성된 2명의 천재와 나를 포함한 나머지 59명의 바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스웨덴 시골 마을. 안개꽃이 흐드러지게 펴있어 좋았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지방도를 따라 달리면서 바깥세상에 핵폭탄이 떨어져도 모를 것 같이 살아갈 듯한 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차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마음은 편해지는 건 왜일까?


'꽃' 표지판.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참사관님, 저 표지판이 뭔지 아세요?"

"글쎄?"

"좀 이쁜 도로를 의미하는 거래요. 알고 난 다음에 보니, 정말 저 표지판 있는 데는 이뻐요."


길은 정말 예뻤고, 과거 여행 시 찍고 싶었던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화단이나 우유 통도 있어, 잠시 정차하고 찍었다. 


내가 또 언제 다시 여길 오랴? 하는 생각에.


 

스웨덴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우유통 이용 마을 입구 표시나 화단.


운전하던 친구가 마을 교차로에서 갑자기 왈  

"저... 잠깐 소변 좀..."

"그래? 여긴 고속도로처럼 화장실 찾을 필요도 없네. 자유다. 눈치껏 대지에 따스함을 주자."

"네 ㅎㅎ"


차를 대고 각자 일을 보는데, 나는 마치고 숲에서 나오다가 동네 미니 박물관을 발견했다.


인구가 적은 마을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역사는 알리고 싶은데 상주할 인력은 없으니, 조그만 움막을 만들어 사진, 신문기사, 기념 소품들을 넣어놓고 알아서 문 열고 들어가 보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스웨덴다운, 또 시골다운 소박함이 묻어있는 재미있는 박물관이었다. 

이하늘의 팬인 나는 수건을 두르는 것을 좋아한다. 
박물관내 전시된 옛날 물개사냥꾼들에 대한 기사.


이후 우리는 12세기 지어져 부서졌다 재건축을 반복했다는 유서 깊은 교회도 발견했고 그 안에 100년 전의 마을 사람들의 사진과 서정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 전망도 볼 수 있었다. 비만 안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 비가 와도 멋진 풍경이었다. 

Nordingrå 교회


마을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이 지역 전체가 Nordingrå라는 Höga Kusten 지역이 시작되는 곳이고, 그래서 지반의 융기(uplift)로 인해 특이한 지정학적 특색이 발현되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태계 구성과 융기의 단계를 설명해주는 마을 안내판

현재 이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호수들은 원래가 바다였는데, 빙하기 끝인 8천 년 전부터 서서히 상승한 육지 안에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호수부터 산등성이까지 다양한 생태계가 형성되고 이는 지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지구 내부에 무슨 힘이 있길래 이렇게 밀어냈을까? 


저 아름다운 호수도 그럼 몇 천 년 후에는 없어지겠네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뒤로하고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Nordingrå의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나오는데 한 시간 이상을 소모했지만, 들어올 때에 비해 느낀 바가 좀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이 들어감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야 할 점이기도 하다.


첫째, Nordingrå 를 돌며 가장 뿌듯했던 사진은 그동안 많이 찍고 싶었지만 못 찍었던 마을 입구 우유통 사진이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음에 또 나오면 찍지 뭐... 결국 스웨덴에 온 지 2년 동안 그걸 찍어본 적이 없다. 


많은 것들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승진하고 나서, 돈을 더 벌고 나서... 하지만 이제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무한정 남아있지 않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고 싶지 않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지금 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의 느림이 주는 여유를 내 옆에 둬야 한다. 항상 그랬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시간 단위로 어디를 들르고 어디서 잠깐 쉬고 어디서 밥을 먹고... 돌이켜보니 여행을 하면서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사색하고 느끼며 돌아보는 시간은 없었다. 


그 많은 사진들은 찍어서 정작 하드디스크의 저장 공간만 채워가지 않았던가. 무슨 팔만대장경 찍을 일이 있냐, 사진들을 그렇게 남겨서 뭐하게... 오늘 한 시간의 여유를 더 갖는 게 낫지. 가만있어도 남들에게 쫓기면서 사는 인생인데, 스스로 나를 쫓는 그런 어리석음을 거두야 한다.  

  

그리고.. 오늘 예쁜 길에 잠깐 들러가자는 제안에 내가 나이가 많다고 "뭔 소리야, 내가 당신보다 더 조사 많이 해서 여기 갈 데도 많은데."라고 무시했다면, 나는 오늘의 이 여유와 행복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참신하고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나이가 많이가 그를 공유하는 것은 간단하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의 '다름'을.


얼마 전 주말에 송승환 씨가 운영하는 유튜브를 보았다. 예전에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멀어져 가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태우는 그의 기사를 보고 다시 보게 되었다. 


그의 유튜브는 오랜 경력의 연기자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인생 교훈을 듣는 내용인데, 마지막에 "젊은 세대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냐"라는 질문을 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두 연기자의 멘트가 있었다. 물론, 둘 다 연기 경력이 40년이 넘는 대 연기자들이다.


한 사람은 "아휴, 요즘 젊은 사람들이 더 똑똑하고 더 잘 알어. 뭘 충고를 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내 말 편집하지 말고 똑똑히 전하세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라고 왜 해요? 나는 아주 맘에 안 들어요. 왜냐면..."이라는 상반된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저렇게 다를 수 있나. 하지만, 나에게 인생의 조언을 구할 기회가 생긴다면 전자에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는 어떻게 보였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가면 누군가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를 정리하며 포기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 인데. 

호수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일상과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면, 타인의 다름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한 시간의 궤도 이탈은 끝났다. 계획했던 여행이 1이었다면, 나는 이후 일정이 1+1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다음 행선지를 향해 떠나면서, 문득 35년 전 그 미술 시간이 생각났다.


옛날에 그 '김' 그림을 그렸던 친구에게, "야, 멋진데! 나 같으면 흰 물감으로 점을 찍어 김 위에 뿌린 소금도 표현했을 거야. 초현실주의 아니냐!"라고 하면서 나도 그와 미술 선생님과 함께 천재 대열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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