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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Sep 26. 2021

마누라 속이기 season2-1

에라, 지난 해처럼 그냥 혼자 갔다 오자

아내 생일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선물로 뭘 해줄 거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

"뭐라고?"

"나라고. 니 인생에 내가 선물 아니냐?"

"....."


아내가 씩 웃으며 제의를 했다.

"내한테 선물로 × 십만 원 줄래, 이번 주 일요일에 교회 갈래? 한마디로 끝내면 된다."

(참고로 난 교회 안 다님)


"교회가께."


아내는 역습+허무+안타까움×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찝찝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진짜가?"

"응."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 주말, 아내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다. 목사님 설교 중 옛날에 삼 형제를 둔 노모가 아들 각각에게 칠순 기념으로 아파트, 벤츠차, 루이뷔통 핸드백, 성경을 읽어주는 앵무새를 선물로 받았는데, 노모가 다 뿌리치고 앵무새를 가장 기쁘게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아내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 끝나고 나오면서 아내에게 한마디 해줬다.


" 올해 니 생일 선물은 앵무새야."


아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않다가, 정지신호를 받고 대기하던 중 옷가게에 걸린 밍크코트를 보고 대뜸 콧소리를 비빔냉면처럼 섞더니


"자기야, 나도 밍크 해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끄덕이고,


'윙크 ^_~' 를 해줬다.^0^


집사람은 인생 맨날 그렇게 살 거냐고 폭언 종합세트를 퍼부었다...




그날 오후도 여전히 거실에서 소파에서 책 좀 보다가 적막한 집안 분위기를 느끼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 아내는 저녁 준비를 마치고 안방에 누워있고, 애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지 조용하다.

그냥 우리에게 있는 일상인데, 뭔가 허전하다. 아까 좀 너무했나? 남들은 이벤트도 많이 한다는데.

하... 근데 내년이 50인데 무슨 이벤트야. 남사스럽게...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썰렁하지.


한 때는 아내와 불타는 사랑을 하기도 했었는데, 16년이 금방 지난 것 같다. 지금은 그냥 가족일 뿐... 별 탈 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작년 '마누라 속이기'랍시고 아내 몰래 스웨덴 일주를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내는 1년이 넘도록 내가 갔다 왔는지 모른다. 관심이 없다는 게 더 맞는 거 같다.

무덤덤한 일상을 극복하고자 체육관까지 끊어가며 오버했지만, 중년 아재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 컸다.


연애할 때는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를 해가며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했지만, 지금은 혼자 여행을 다녀와도 굳이 속일 필요도 없는 50살을 1년 앞둔 중년 부부가 되었으니... 속인다고 한 자체가 웃겼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몇 년 전 술자리를 했었던 선배들이 그랬고, 지금 직장에서 꼰대로 몰려가며 분투하고 있는 친구들이 그렇다. 남편들은 굳이 마누라들을 속일 필요가 없다.

 

연애할 때 이랬던 거리가 지금은 태평양 건너 같다.

올해는 연초부터 일이 많았다. 결원도 갑자기 생겼는데 충원이 되지 않았고 상사도 바뀌는 바람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아이 학교 문제로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일도 생겼고 아내도 응급실에 실려갈 일도 생겼으며 한국에서는 부모님 건강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중년 남자들이면 대부분 몸에 생기는 고장이 추가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 전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다 보니 유독 중년 남자들의 고민에 대한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찾아가면서 들었는데, 고민들은 공감이 되지만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음 주에 만날 스웨덴 사람과의 스몰토크를 위해 스웨덴 내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대한 책을 읽다가 '어차피 스웨덴 밖도 못 나가는데 한 번 안에 있는 자연유산이나 다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할 거면 스웨덴 21개 주(län) 중 가보지 않은데로 골라볼까 하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다. 


Höga Kusten(영어로는 High Coast)이라는 곳이었는데 조용하게 생각을 정리하기 좋을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그랜드캐년을 방불케 하는 협곡도 있는 화려하진 않지만 묵직한 남자 같은 자연이 있는 국립공원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잠든 밤, 혼자 거실에서 여기저기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 그냥 주말 동안 다녀올 수 있을 만큼 큰 준비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촌동네다 보니 숙박 옵션은 캠핑장 밖에 없는 듯하나 좋을 것도 같다. 





Höga Kusten 설명 책자나 웹사이트에 나오는 대표적인 이미지들. 그냥 명상이 절로 될 것 같다.
Slåttdalsskrevan이라는 대협곡 소개 사진. 가장 가보고 싶은 동인이 되었다.


문제는 생각보다 산이 험준한 것 같아 아내와 아들을 끌고 가기도 뭐하고, 집 밖에서는 화장실도 안 갈 만큼 공동 샤워장과 화장실 사용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내를 캠핑장에 끌고 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한편으론 왜 맨날 여행 계획은 내가 다 세우는데 이것까지 신경 써야 하지?라는 생각도 들고.


잠이 들면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 에라 지난해처럼 그냥 혼자 갔다 오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속이지도 말고 아내에게 그냥 말하고. 죄짓는 것도 아닌데. 물론 고양이 앞에 쥐처럼 과연 아내에게 말할 수 있을까가 걱정되었다.


다음 날 '밥 묵자'에 나오는 김대희처럼 아침을 먹으면서 나는 선언을 했다.


"나 다음 달에 주말에 혼자 캠핑 좀 다녀올게. 너무 답답하고 머리도 좀 식혀야겠다. 한 다섯 시간 걸리는 덴데, 당신은 캠핑장도 별로 안 좋아하고 등산도 별로잖아."


담담하게 말했지만, 지난번 윙크 사태로 폭언 폭탄을 맞은 여파가 아직 남아 아내의 반응이 두려웠다. 아, 불쌍한 중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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