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스톡홀름을 떠난 지 며칠이 됐고 북위 65도를 넘어섰다.
북극권(북위 66도 33 이상)이 가까워졌다.
생각해보니 당초 Inlandsbanan 때문에 왔는데, 정작 그를 보진 못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차를 끌고 철길 따라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간판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하는 순간, 우연히 도로와 겹치는 Inlandsbanan 건널목과 마주치게 됐다.
이 야호, 바로 이거야. 내려서 철길 위를 돌아다녔다.
생긴 건 간첩 같지만... 서울 산 49년짜리 인간입니다 철로의 돌을 줍고(취미라...) 다시 Inlandsbanan 박물관이 있는 Sorsele로 향했다. 박물관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어딜 가나 박물관에 가는 걸 참 좋아하는데, 이 박물관은 Inlandsbanan의 명성에 비하면 정말 소박했다. 나름 얼마나 고생해서 이 산간 철도를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내용들이었는데, 겉치레보다는 내실을 중요시하는 스웨덴인들의 정서가 꼬박 담긴 곳이었다.
Inlandsbanan 건설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출처 : Inlandsbanan 박물관)
박물관을 떠나며 고민했다. 더 올라가서 Inlandsbanan의 끝인 Gällivare까지 갈까? 아니면....
진행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작년에 출장으로 Kiruna에 갔었기에 북극권에 진입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숲도 좀 지겹기도 하고 말이다. 오히려 언제 들었던 것 같던 도시인 Boden 이라던지, 스웨덴의 15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Gammelstad가 있는 Luleå에 더 가고 싶었다.
반환점인 룰레오(Luleå)에서 핀란드 국경까지 1시간 30분밖에 안 걸린다. 그래서 들른 Boden은 러시아에 맞서 세운 방어 요새로 유명한 군사도시였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별 감흥은 없었고, 룰레오는 Gammelstad (커버 이미지 참조)가 볼만하긴 했으나 우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스웨덴의 시골마을에서 종종 보는 성당 정도? 물론 안내센터에서 사 온 소개 책자를 보니 나름 의미가 있는 유적였지만 인터넷에서 확인한 그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허겁지겁 우메오(Umeå)로 내려갔다.
우메오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룰레오와 우메오도 북부의 노르보텐 주와 베스테르보텐주의 주도(state capital)인 만큼, 나름 이 동네에서는 큰 도시다 보니 어제까지 본 자연을 둘러싼 그런 감동은 없었다.
다만, 11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아 붉게 물든 북부의 밤만 좀 달랐을 뿐.
목성의 위성에 도착해 목성을 바라보면 이런 하늘이 아닐까? 숙소 인근에서 바라본 해 질 녘 붉은 하늘(23:05분경)
오늘 달린 거리를 총 합해보니 600km 정도 됐다. 근데 어제까지의 큰 감흥이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숙소에 누워 이리저리 생각하다 새벽 두 시 반쯤 깨서 잠시 밖으로 나와봤다. 이젠 어두워져 약간의 별도 좀 보였다. 혼자 담배 피우기 딱 좋은 그런 밤이다.
벤치에 앉아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고, 거기서 정말 오랜만에 '페가수스자리'를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의 결말은 '... 그래서 제우스가 불쌍해서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별자리 이름의 대부분은 그리스 신화에서 온 것이다. 계절을 대표하는 별자리로는 봄에는 사자자리, 여름에는 백조자리, 가을에는 페가수스자리, 겨울에는 오리온자리와 같은 것들이 있고, 대부분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처럼 밝은 별들이 많아 찾기도 쉽다.
별자리를 좀 공부해 본 이들은 알겠지만 계절별 대표 별자리 중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페가수스자리다. 다른 것들과 달리 1 등성이 없고 2~3 등성의 어두운 별로 구성이 되어 그렇다.
페가수스자리는 여름 늦은 밤에는 볼 수 있다. (출처 : 신동아 2019.11월호) 페가수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가 죽인 메두사의 머리에서 나온 피로 만든 천마(天馬)로, 괴물로 변하기 전 아름다운 처녀였던 메두사를 좋아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만든 것이다.
페가수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도움으로 벨레로폰이라는 청년이 차지하게 되는데, 그는 페가수스와 함께 여러 가지 모험을 통해 성공하고 한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승승장구 끝에 왕의 후계자까지 된다.
이후 벨레로폰은 자만심에 빠져 자신을 신이라 생각해 신들의 세계로 가고자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제우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제우스가 페가수스를 놀라게 하여 벨레로폰을 땅으로 떨어뜨리게 한다.
페가수스 별자리는 놀란 페가수스가 은하수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모습이다. 내 생각엔 벨레로폰 같은 인간이 다시는 차지하지 못하도록 이 별자리를 어둡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어렸을 적 이 별자리를 꽤나 찾으려고 했었는데, 밤하늘이 탁한 서울에서는 찾기 어려워 결국 포기했었다. 그건 안 보이는, 그래서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던 별자리였다.
이후 십여 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어느 가을밤, 나는 기숙사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페가수스를 보았다. 우리 대학은 시골 산자락에 있어 별은 잘 보였지만 그렇다고 굳이 페가수스를 찾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그날 우연히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게 있었네... 있었어... 하면서 말을 더듬던 그 밤하늘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지만, 그때 스물서너 살에는, 젊은 날의 사랑으로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다. 한 번도 못 봤던 페가수스자리를 찾았다는 것은 10년을 넘게 기다려온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나에게 더 찾을 별자리가 없어져버렸다는 공허감을 남겨 주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대학 4학년 때 교지 '청람'에 기고했던 나의 첫 단편 소설 '파스텔'의 모티브가 되었던 페가수스자리 부분.
이제는 오래전 기억이다.
대학 3학년 때니 벌써 26년 전.
그때는 좀 순수하기라도 했었네.
별자리 한 번 봤다고 소설까지 썼었으니.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푸악 웃음이 나왔다.
늦은 밤, 이렇게 혼자 앉아있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이 생각났다.
나이가 먹을수록 왜 이렇게 틈만 나면 잡생각이 많이 나고 잠까지 안 오게 하는지.
짧게는 스웨덴에 와서 쏟아지는 일로 정신 못 차리면서도 현지 정착도 힘들어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고, 그래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먹었었던 기억들. 멀리는 지뢰밭 같기만 했던 이십여 년의 직장 생활의 기억.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십이 다 되도록 아직도 막막하기만 하고, 수풀을 헤쳐가는 것 같은 느낌들... 커피를 사발로 마셔도 잠만 잘자던 내가 불면증으로 날을 새우던 스톡홀름의 하얀 밤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억에서는 사라졌었는데 저 별자리는 그래도 있었네?
지난번엔 10년 주기 더니, 인제는 20년 주기냐?
혼자 미친놈처럼 중얼거려 본다.
그래도...
없어진 줄 알았는데...
지난해 가을에도, 그 전 가을에도
그렇게 나를 지켜봤겠지.
안 그래도 사람들 하나하나 잊혀가는 나이인데,
다시 찾아와 주는 것도 있네.
허허... 허허... 허허...
스웨덴 어느 밤하늘 아래
벤치 위에 쓸쓸히 앉아있는 한 남자의 넋두리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게
그렇게 퍼져나갔다.
어찌 보면, 가장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오늘 하루가,
페가수스자리 하나로
가장 별(star) 볼일 있는 최고의 일정이 되었다.
누군가 나를 계속해서 봐주고 있으니
잘 살아온 것 같고
앞으로도 잘 살아보자고
그렇게 외치며 노래와 함께 잠이 든다.
"Bravo, Bravo,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