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 찍어보니 우메오에서 출발하면 논스톱으로 653km, 7시간 40분의 거리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동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대도시들이 발달돼있다. 우메오-순스발-후딕스발-예블레-웁살라 그리고 스톡홀름. 대도시들이라 가다 보면 좀 볼거리가 있겠거니 하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비도 내리고 중간중간 통과하는 대도시들은 별 특색들이 없었다.
가도 가도 똑같은 길, 지루한 빗줄기, 점점 늘어나는 건물들과 사람들.
그래, 나는 지난 며칠간의 숲과 호수와 하늘과 별들의 세상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정상인 거고,
며칠 전 봤던 것은 그냥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다 우연히 발견한 별똥별들이었던 거지.
"뭐해?"
잠시간의 생각을 깨우는 아내의 전화.
"어, 집에 있기 답답해서 그냥 드라이브 나왔어."
"뭐? 어떻게 맨날 나와 돌아댕겨? 어딘데? 사진 찍어 보내 봐."
"(또 이정재 사진 보내면 죽겠지?....) 음..."
"또 헛소리하면 알아서 해!"
"... 니 맘 속에 있어. 늘 그렇듯이."
"... 미친 거 아냐? 아침 먹은 거 다 토하게 하네...."
그래, 한 때는 이런 멘트도 먹힐 때가 있었지.
스컹크 작전이라고나 할까. 사전에 기가 막혀 접근을 못하게 하는... 웃으면서도 씁쓸하다.
그래도 한참 연애할 땐 "좀 얘기한 거 같은데 벌써 새벽이야!"라고 할 만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이젠 고목나무에 물 뿌리는 수준이 되었으니.
후딕스발(Hudiksvall) 항구 앞에서, 그날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다.
점심이 되어 후딕스발(Hudiksvall)이란 작은 어촌 마을에 들려 점심 때우고, 주변이나 들러보았다. 자그마한 성당, 부둣가의 빨간 집들, 정말 조용한 도시.... 이런데 살면 정말 세상에 난리가 나도 모를 것 같았다. 그렇게 사는 인생도 괜찮지 않을까? 시원한 바닷바람, 조용한 시내에 중앙에 자리 잡은 오래된 성당, 천천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 나도 단조로움에 빠져보았다.
남쪽으로 다시 기수를 돌려 내려갈수록 점점 도시는 더 커지고 차는 많아져갔다. 잠시 들렀던 스웨덴 4대 도시인 웁살라도 별로 내려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디어 스톡홀름에 들어섰고, 나는 저녁 8시가 돼서야 집에 다시 들어왔다. 완전한 일상으로 복귀, 나의 3박 4일간의 일탈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시시하게 끝났다.
여행을 시작하기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죽기 전 후회하는 5가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1.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
2. 솔직하지 않은 것
3. 너무 열심히 일한 것
4. 친구와 연락을 끊은 것
5. 행복을 적극 선택하지 않은 것
특히, 5번의 경우 행복은 크기가 아닌 빈도의 문제이며, 작고 사소한 것을 가능한 많이 늘려나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번 일탈에서 많은 것을 실천했다. 첫날, 그냥 세 시간의 드라이브만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오늘의 저녁을 맞는데 편안히 집에서 그리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그 세 시간 후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어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1~4번을 어떻게 했었는지 평가하기는 힘들겠지만, 5번은 맞는 것 같다. 어디서 보니 학력고사 세대인 74년생까지는 2차 베이비붐 세대라고 하니 나도 거기에 들어간다. 콩나물 시루떡 같은 교실에서 인성보다 성적 위주의 가르침을 받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90년대 말은 IMF로 직장을 다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며, 신혼을 시작한 2000년대 후반 공무원 임대아파트에서 출퇴근 왕복 두 시간 반을 버티다가, 아이를 낳고 가장이 되며 이직한 새 직장에서 30대 후반의 중고 신인으로 담배가 유일한 벗으로 외국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50살이 된다.
지금껏 나의 삶을 보면, 큰 일탈 없이 정해진 길대로 평탄히 살아온 것 같다. 어릴 적은 부모 말씀을, 사회인이 돼서는 조직의 지침을, 그러면서 가정에서는 충실한 가장과 아빠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절대 일탈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래서 잠잘 때도 삐딱하게 자지 않고 똑바로 자려고 노력까지 하는 내 모습을 보면...
예전에 직무 교육을 받으며 어느 교수님이 강의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중년 남자들이 많이 보는 게 뭡니까. 1. 동물농장 2. 나는 자연인이다. 3. 이종격투기, 그리고 밤엔 혼자 몰래 그거(?) 보잖아요. 셋 다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 다 보통 직장인들의 평상시에 못하던 것들이잖아요? 동물처럼 맘대로 삽니까? 자연인처럼 하고 싶은 대로 살아요? 이젠 몸도 말을 안 들어 이종격투기 선수들처럼 날아다니지도 못하니까 맨날 쳐다보면서 대리 만족하죠? 그러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게 번아웃(Burnout)이죠.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봐요. 간단해요. 평상시에 못하던 하나라도 해봐요. 그걸 꼭 못할 짓에서 찾아야 하나요? 도박이나 못된 짓 말고도 못하던 것들 많잖아요. 주말에 자전거 타고 한강이라도 달려보라 이겁니다. 해보고 문제가 해결되는지 안 되는지 보라 이겁니다."
강의를 들을 때 (물론 '그거'에서 특히) 다들 웃고 킬킬대며 맞장구쳤지만, 실제 그렇게 해보지 못해 쓴웃음 짓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그럴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남자들이 유독 그렇다. 그냥 일, 일, 일, 일.... 일에서 탈출하는 일탈은 점점 거리가 먼 얘기가 된다.
부부끼리 만나 식사를 해도 부인들끼리는 정말 다양한 화제에 얘기가 끝이 날지 모르지만, 남편들끼리는 90% 이상 일 얘기다(10% 잠깐 벗어났다가 다시 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이내 화제가 중단돼 뻘쭘하게 있다 서로 얼굴 한 번 쳐다보고 피식 웃다가 자기 마누라를 한 번 쳐다본다. 이후 아 제가 화장실 좀... 하고 자리를 뜬다. 겨우 부인 눈치 줘서 돌아오는 길에 "아 뭔 얘기가 그렇게 많아"하고 차 안에서 짜증이나 내면서도 내심 부럽기도 하다. 이러다 일이 없어지는 순간엔? 그래서 선배들이 퇴직하고 그렇게 외롭다고 하나보다..
파일럿 프로젝트.
나는 이번에 일탈이라는 파일럿 프로젝트에 성공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이 행복은 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집에 계속 있었다면 밥 해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다가 아내가 없음에 왜 이리 안 돌아오냐고 아내의 전화에 짜증을 냈겠지만, 나는 늘 아내의 마음속에 있다는 걸 확인해주고 나 또한 실제로도 며칠 후 아내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