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인 80년대는 외국 팝이 가요를 압도하던 시절이었고, 주옥같은 노래들이 많이 나왔다. 85년 개봉된 '백야(White nights)'의 주제가인 Say you, Say me는 빌보드 차트를 석권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초등학생인 나도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몇 안 되는 곡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하얀 밤, 백야가 있을 수 있나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35년이 지나 나는 백야의 나라에 왔다.
백야는 밤이 돼도 해가 지지 않는 북극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전에 사무실 동료에게 나도 언젠가 백야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분이 '스톡홀름에서도 여름에는 밤 10시가 넘어야 어둑해지고 대낮같이 환한데, 뭐하러 굳이 북쪽까지 올라가서 봅니까'라고 말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하긴 그렇다.
여름 한창일 때는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나 어둑한 북구의 나라에서 백야는 그다지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 여름에 매일 겪는 현상인 - 그것도 잠도 못 자게 비 교감 신경을 건드려 암막커튼을 쳐야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짜증 나는 - 밤을 몇 시간 줄인 것에 불과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오후에 라플란드를 넘어선 나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비도 추적추적 오고 점심을 허기지게 먹어 체크인하자마자 동네 슈퍼에 가서 물을 사다가 방 안에서 라면을 먹고 나니 몸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차에 짐을 가지러 다시 나왔을 때가 9시가 좀 넘어서였는데 내리던 비도 좀 멎었다. 짐을 들고 다시 들어가며 낮에 좀 오버했으니 빨리 씻고 자야지... 하며 들어가다 로비에 있는 지역 관광 안내 책자를 집어 들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마다 꼭 집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 동네 관광 안내서와 들판에 있는 돌이다.
관광안내서는 수집하듯 가져오는데, 오늘 머문 곳인 Storuman은 5천여 명 남짓 사는 베스테르보텐 주내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 동네의 면적은 8,234㎢로 서울(605㎢)의 거의 14배나 되며 전국 290개 자치단체 중 9번째로 크지만, 인구밀도는 1㎢당 1명이 안 되는 정말 사람이 드문 마을이다. 위키피디아에 검색해도 별 내용이 없다.
Storuman의 관광안내서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석양을 배경으로 그럴싸한 호수에 섬들이 무슨 퐁당퐁당 하듯이 널려져 있으며 그 섬들이 식물 줄기 같은 길로 연결되어있는 사진이었다.
Storuman 관광책자-하도 외진 데여서 구글에 찍어도 이 호수 이름이 뭔지 나오질 않는다.
"이야~ 이거 그럴듯하지 않아? 내일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여기 가보고 뜨자구."
"구글에 보니까 차로 5분도 안 걸릴 거 같은데요.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지금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오는 게 어떨까요. 배도 부른데."
"그래? 그럴까? 하긴 오늘 일정도 다했는데 내일 아침에 수선 떠느니 그게 낫겠네."
워낙 작은 동네라 숙소에서 호수까지 가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2시를 넘으니 좀 어둑어둑 해지는 것도 같고, 섬 입구에는 동네 사람들인 듯한 젊은이들이 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조금 위험하게 느껴져 입구에서 사진만 찍어 보았는데, 아직도 환한 하늘이 신기하긴 하다.
좀 더 잘 찍어보자고 멈칫한 사이 한 3~4분 흘렀는데 배경이 바뀌어 버렸다. 22:40 경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입구가 그런데, 이 퐁당퐁당 섬의 끝까지 따라간다면, 태양을 직접 볼 수도 있을까... '
그래서 따라 들어갔다.
물론 가는 길은 인기척이 거의 없는 곳이기에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남자 둘이 갔으니 용기가 났지, 혼자였으면 못 갔을 듯 -_-;), 점점 따라 들어가도 해는 지평선 아래로 안 떨어지고 있었다.
결국 섬의 끝에 도달하고 더 이상 길은 막혀있었다. 하지만 더 갈 필요는 없었다.
거기서 나는 백야의 정점을 보았고, 그것은 스웨덴에서의 나의 인생 샷이 되었다.
섬의 끝에서 지평선에 걸친 태양을 배경으로. 수풀이 도로를 막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22:54 경.
위에 사진 찍은 곳에서 돌아갈 쪽을 바라본 풍경. 대낮 같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풍경은 님프들이 튀어나와 인사할 것 같이 신비했다. 게다가, 하늘은 쌍무지개까지 만들어주었다. 날이 개고 해가 지평선에 닿을 만큼 내려갔으니 무지개가 생기는 초등학교 때 배운 원리까지는 알겠는데, 쌍으로 이렇게 보여주다니(이놈의 인기는... 땡큐).
엘프가 숨어있을 듯한 호숫가
왼쪽 지평선에 걸친 태양이 은은한 조명 아래 뜬 쌍무지개. 23:10경.
섬을 돌아 나오며, 자정을 기해 사진을 찍고 백야 기행을 마무리 지었다. 물론, 가장 많이 생각난 건 아내와 아들이었다 (진짜다 -_-+). 같이 와서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물론 이럴 줄 알고 온 것은 아니지만. 쏟아지는 기상 쇼를 보는 동안 오늘따라 전화도 안 하는 아내가 더욱 고마웠다.(아까는 보고 싶대더니... ^0^) 감사함과 미안함, 그리고 뿌듯함을 안고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인증 차원에서 왼손에 든 디지털시계 앱. 2020.7.4.(금) 23:59에서 7.5.(토) 00:00로 넘어가기 직전.
새벽 1시가 다 돼서 침대에 누워 Say you, Say me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35년 전, 나는 오늘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화 '백야(White nights)'는, 백야가 시작되는 계절에 항공기 불시착으로 망명에 실패한 구 소련의 발레리노와 반전주의자로 소련에서 살아가는 미국 출신의 흑인 탭댄서가 다시 자유 세계를 향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 하나 결국 백야가 끝나는 계절에 같이 탈출하며 우정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이해가 안 간다고? 그럼 봐).
배경이 되는 백야는 모두가 잠들어 있지만 세상은 잠들지 않는 극한의 대조를 상징하며, 한편 모두가 잠들어 있는데 나는 잠들지 않는 극한의 외로움을 표현해준다. 함께하고 이해해 줄 그 누군가를 그리는 주제가 Say you, Say me의 가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노래하고 있다.
As we go down life's lonesome highway
우리가 삶의 고독한 고속도로를 걸어갈 때
Seems the hardest thing to do is to find a friend or two
가장 어려운 것은 친구 한 두 명을 찾는 것 같아.
A helping hand, someone who understands
도움을 줄 수 있는,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 (같은 친구)
That when you feel you've lost your way
네가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You've got someone there to say
거기서 이렇게 말할 사람을 찾을 거야
I'll show you
내가 너한테 보여줄게
Say you, say me
'너'라고 말하고, '나'라고 말해
Say it for always, that's the way it should be
영원히 그걸 말해, 원래 그러는 거야
Say you, say me
너라고 말해, 나라고 말해
Say it together, naturally
그걸 같이 말하자,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친구와 달리, 점점 터놓고 너, 나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커녕 이익을 좇아 사라져 가는 인간들에 실망하고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나이에 들어서고 있는 나와 같은 40대 중년 남자에게, 어찌 보면 "Say you, say me"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35년 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상상이 오늘 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스톡홀름에서 보던 미완의 백야가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완전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