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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May 20. 2022

세대전쟁 in 스웨덴

7-2 IKEA의 성공 스토리 4가지

*Älmhult에 있는 IKEA 매장



스웨덴의 유명한 기업들을 보면 남부지방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자동차인 Volvo, 트럭으로 유명한 SCANIA, 최고의 보드카인 ABSOLUT VODKA, 카톤팩을 처음 개발한 TETRA PAK... 물론 IKEA도 지금도 이름도 낯선 남부 Kronoberg주의 Älmhult에서 시작됐다.


그럼 남부가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이어서 이런 세계적인 기업들이 나온 걸까? 사실 스웨덴 전역은 프랑스와 같이 유럽 본토의 나라들에 비해 농사를 짓기 열악한 지역이다. 겨울이 길고 땅 또한 비옥하지 않다. 지금도 스웨덴은 대부분의 과일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에서 수입을 해온다. 바이킹도 사실 이 땅에서만 한정하여 살기엔 어렵기 때문에 밖으로 나갔었을 것이다. 스웨덴이 잘 살게 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스웨덴 남부의 모습들(출처: IKEA 박물관)


심지어 19세기 말에는 대기근으로 상당수가 굶어 죽었다고 하며 전체 인구의 1/3이 미국 등으로 이민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겨진 자들의 삶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은 생존을 위해 죽어라 하고 노동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남부지방은 땅에 돌이나 바위가 많아 개간을 하려면 이를 빼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 간의 협동은 필수적이었으며, 역설적으로 이러한 전통은 사람이 모여 기업을 하기 좋은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태운 배가 떠나가는 스웨덴 어느 항구의 모습(출처: IKEA 박물관)


다만, 이것이 IKEA의 성장 배경이라고 볼 수 있을까? 창업자 Ingvar Kamprad의 일생을 걸쳐 그 성공 스토리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타고난 재능과 가족의 사랑


IKEA의 창업자 Ingvar Kamprad는 이러한 분위기의 남부 소도시 Älmhult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인 Agunnaryd에서 6km 떨어진 외딴 농장인 Elmtaryd에서 1926년 태어났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이 주신 자신만의 장기를 타고나는 것일까.  그는 5살 때부터 상점을 운영하던 외가의 도움으로 스톡홀름에서 성냥을 사다가 팔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고객은 늘 그의 할머니였다고 한다. 남에게는 엄했지만 손자인 Ingvar Kamprad에게는 한없이 따듯했던 할머니는 그가 어떤 물건을 가져오던 조금씩이라도 사주었고,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장사라는 개념을 좀 더 일찍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Ingvar Kamprad가 19살이 되던 해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생전에 쓰시던 책상에 그에게 샀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그러한 사랑은 후일 그가 세계 최고의 가구 업체를 이끄는 인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시절의 Ingvar Kamprad의 모습과 그가 처음 팔았던 성냥(출처: IKEA 박물관)



2. 시대의 흐름을 타고 역경을 이겨내는 발상의 전환


Ingvar Kamprad는 공부는 그렇게 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진학하지 못했지만, 학교 기숙사의 자기 방에 문방구를 차리고 장사를 했다고 하며 거기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졸업을 앞둔 1943년 고향 집 농장 Elmtaryd의 가로세로 1m 창고를 주소지로 IKEA를 회사로 등록했다.


시골의 좁은 창고를 회사로 삼아 물건을 팔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조차 의아해했지만, 그가 자신이 있었던 것은 당시 집집마다 보급화되가고 있던 전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웨덴 내 전화기의 보급은 이를 이용한 통신판매 업체의 증가로 이어졌는데 Ingvar Kamprad는 이를 주목했던 것이다.


다만, 시골 농장에서 물건을 배송하는 기차역이나 도심지로 운반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는 농장에서 짜낸 우유를 운반하기 위해 하루 한 번 농장 일대를 돌던 우유 트럭 운전수에게 수고비를 주고 기차역까지 운반하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우유 트럭을 이용한 배송(출처: IKEA 박물관)


당시 IKEA는 다른 통신판매업체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품목을 다뤘는데,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며 경쟁은 치열해지고 수익은 줄어드는 레드오션으로 변해가자, 생존을 위해 Ingvar Kamprad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가구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그가 나고 자라 IKEA까지 세운 Agunnaryd는 울창한 침엽수로 뒤덮인 동네라 목재가 풍부했고 이에 따라 가구 제조업체들이 옛날부터 많아 가구를 통신 판매하기에 좋은 입지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사람들이 새 집을 짓고 가구를 채우면서 그 수요가 폭발했는데, 기존 업체들은 이를 비싸게 팔아 소비자들은 싸게 사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상황이었다.


Agunnaryd의 풍경

Ingvar Kamprad는 이러한 여건과 변화를 충분히 살려 1948년 처음으로 의자와 커피 테이블을 판매했고 이는 폭발적인 시장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51년에는 아예 다른 상품의 판매를 중단하고 가구 판매에 전종 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또 고민에 봉착한다. 가구를 싸게 사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동네뿐만 아니라 스웨덴 전역에 널려있는데, 과연 어떻게 하면 그들과 IKEA를 연결시킬 수 있는가였다.  


그가 내린 결론 '광고'였고, 판매하는 가구를 홍보하는 책자를 주간지에 끼워 돌리게 했다. 전화기와 홍보 책자를 통해 Ingvar Kamprad는 스웨덴의 촌구석에 있던 IKEA를 전국으로 연결했다.


다만, IKEA를 알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바로 판매 증가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가구를 홍보 책자만으로 보고 산다는 것이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직원이 이런 제안을 한다.


"가구를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전시장을 만들어, 홍보 책자를 보고 관심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 보고 만족하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럼 품질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잖아요."


Ingvar Kamprad는 인근에서 중심지인 Älmhult의 번화가에 철도역과 가까운 제재소 건물을 사들여 1953년 제1호 전시장을 짓는다. 사람들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대중교통 수단인 기차를 이용하도록 철도역과 가까운 곳에 전시장을 세우고, 나중에는 철도청과 협의해 고객들에게 할인된 기차표도 제공하는가 하면, Älmhult 내 호텔과 식당을 잡아 저렴한 가격으로 숙박할 수 있게도 하였다.    

IKEA 제1호 전시장의 개관 당시 모습. 현재는 IKEA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출처: IKEA 박물관)


전시장 개관일에는 철도역에서 전시장에 이르는 길이 사람들로 꽉 차는 대성공을 이뤄냈으며, 이를 발판으로 IKEA는 본격적인 성장을 구가하게 된다. 다만, IKEA는 여전히 통신 판매업체라 고객들이 전시장에 와서 보고 돌아가면 배송해 주어야 했고, 배송 비용의 문제는 여전히 기업의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Ingvar Kamprad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객들이 산 가구를 슈퍼마켓처럼 자기가 갖고 돌아가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은 IKEA의 한 직원의 아이디어로 해결되었다. 이 직원은 홍보 책자를 촬영하기 위해 매번 가구를 창고에서 꺼내 차에 싣는데 애를 먹었는데, 어느 날 탁자를 촬영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차에 싣기 힘들자 홧김에 그 다리를 잘라 차에 실었다고 한다. 크기가 커서 안 들어가던 탁자는 자르고 집어넣으니 공간이 남아돌게 되었고, 여기서 조립식 가구 판매의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1955년 최초의 조립식 탁자가 탄생하고 IKEA는 1958년 기존 전시장을 조립식 가구로 채워 넣은 판매장으로 바꾸었으며, 현재와 같이 조립된 가구를 보고 조립되지 않은 가구를 사 가지고 가는 시스템으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 IKEA에게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스웨덴 내 다른 가구 판매상들이 급성장하는 IKEA를 공공의 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가구 제조업자들에게 IKEA에 가구를 공급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고, IKEA 직원들이 가구 관련 행사조차 출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스웨덴에서 가구를 공급받기 어려운 상태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때, Ingvar Kamprad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받기 위해, 가격이 비싼 독일이나 프랑스도 아니고 운송비가 많이 드는 미국과 아시아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경제협력 논의가 이루어지던 공산권 국가인 폴란드의 외무장관이 스웨덴을 방문한다는데 주목하고, 경제 수준이 떨어지고 공산권인 폴란드에서 가구 공급을 받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폴란드 기술자들의 수준이 스웨덴 못지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폴란드에 스웨덴의 설비를 투자해, 과거보다 절반 수준의 싼 값으로 가구를 공급받는 길을 만들 수 있었다.  



3. 새로운 가치의 창조


가. 기존의 가구는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비싼 것이었고 그래서 물려받아 쓰는 것이었다. IKEA는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가구를 누구든지 원하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로 바꾸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값싼 가격'이었다.

IKEA의 가구가 저렴한 가격임에도 품질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도한 잡지 기사(1964년, 출처: IKEA 박물관)

그렇기에 Ingvar Kamprad는 품질 이상으로 가격을 중요시하며 자사의 개발자들이 항상 가격에 염두할 것을 강조했다. 소재도 티크나무에서 참나무로, 참나무에서 소나무로, 다시 나무를 잘게 부숴 압착한 파티클보드로 바꾸면서, 내구성과 같은 품질은 유지하되 끊임없이 가격을 낮춰갔다.


고객이 주문하면 점원이 가져오는 방식도 고객이 가져오면 점원이 계산하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줄이고, 저렴한 쓰레기통을 생산하기 위해 식품용 캔을 만드는 회사에 제작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플라스틱 양동이 회사에 플라스틱 의자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구두쇠로도 유명한 Ingvar Kamprad의 이러한 사상은 1974년 그가 직원들에게 보낸 '어느 가구상의 유언'에도 잘 나와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누구나를 위한 가구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



나. '배고픈 이들은 가구를 사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Ingvar Kamprad의 생각에서 시작한 IKEA 레스토랑은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며 IKEA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IKEA 레스토랑(출처: IKEA 박물관)

IKEA에 오는 것은 단순히 가구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오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은근히 이 식당을 통해 스웨덴의 문화를 전파시켜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트볼이나 훈제 연어와 같은 요리들이다. Ingvar Kamprad는 이를 통해 스웨덴을 가지 않아도 전 세계 수백 개의 IKEA 매장을 통해 스웨덴에 온 것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민간외교사절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IKEA의 유산 중 스웨덴, 그것도 Älmhult에서만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IKEA  박물관과 그 맞은편에 있는 IKEA 호텔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IKEA 박물관은 1958년 지어진 IKEA의 제1호 전시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것으로 사실 Ingvar Kamprad 개인의 일대기와 사상을 기록한 개인 박물관에 가깝다. 다만, 그것이 개인을 추앙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Ingvar Kamprad가 곧 IKEA이고, 그 IKEA의 사상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박물관은 방문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IKEA 박물관 입구의 Ingvar Kamprad 사진. 자세히 보면 IKEA 직원들의 사진들의 조합이며, 이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IKEA 박물관 내부 전경


IKEA 호텔은 1964년에 지어져 지금도 손님을 받고 있는데, 로비부터 객실까지 전 인테리어를 IKEA 가구로 도배를 해 하루 묵으면서 말 그대로 IKEA를 푹 체험할 수 있다.

위로부터 IKEA 호텔의 로비, 객실, 공동주방


4. 끊임없는 실수와 노력


Ingvar Kamprad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스웨덴에서도 아주 시골 촌구석에서 세계 최대의 가구업체를 일구어낸 위대한 기업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앞서 본 대로 그는 매번 승승장구한 것이 아닌 계속되는 시련과 도전에 맞서야 했으며 매 순간순간 치열한 고민과 지독한 노력으로 극복했다.


그렇다고 그가 신적인 존재만인 것은 아니다. 그는 "나는 하루도 서너 가지 실수 없이 지내지 않았다. 실수 없는 인생은 성공하기 어렵다."라고 말했으며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실수를 장려했다고 하는 바, 이러한 실수 또한 그가 성공을 이루는데 하나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은 가히 존경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좌) 책상 옆에 외우기 위해 적어놓은 단어들 (우) 실수에 대한 Ingvar Kamprad의 말(출처: IKEA 박물관)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은 "아... 그 IKEA가 이 IKEA였구만..."을 연발했다.

발표를 마친 TS팀의 박대신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IKEA의 역사는 스웨덴 역사의 축소판인 거 같습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 그리고 승리. 이것이 평생 이어진다는 거죠. 그러기에 스웨덴에 진출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겁니다. 좀 더 멀리 보고 멀리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웨덴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IKEA 호텔 로비에 있는 Älmhult 주변 안내도


* 이글은 IKEA 박물관과 호텔을 방문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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