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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Jul 18. 2022

세대전쟁 in 스웨덴

9-2 Halland주- Bocksten Man 프로젝트가 주는 교훈

*Bocksten Man

* Halland 문화역사박물관에서 구입한 Bocksten Man 소개 책자 표지


북서유럽에서는 과거에 죽은 시신들의 상당수가 토탄 늪지(peat bog; 석탄 등이 흙과 엉겨 형성된 습지)에서 발견됐는데, 이들은 19~20세기 이 늪지에서 탄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작업자들은 얼마나 놀랬을까?).


대다수는 철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됐는데, 그 이유는 토탄 늪지가 일반적인 환경보다 산성(acid)이 부족해서 상대적으로 사체, 복장, 나무, 가죽들이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6년 Bocksten Man 발견 당시 토탄 늪지(출처: BM 설명 책자)

 

이들 대부분은 권력자들에 희생된 사람들이 었는데, 덴마크에서 발견된 Tollulnd Man의 경우 피부까지 잘 보존된 상태로 목에 밧줄이 묶여 죽은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스웨덴 Halland에서 발견된 Bocksten Man의 경우, 이들보다 사망 추정 시기는 다소 늦지만, 더 이상 인신공양을 하지 않던 기독교 시대 매장되고 복장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학자들이 중세시대 복장을 얘기할 때 빼먹지 않을 만큼 유럽 내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다고 한다.

유럽에서 시신이 잘 보존된 채 발견된 늪지 인간들(Bog Men; 출처 Halland 박물관)


그럼 얼마나 복장이 잘 보존된 채 발견되었길래 그럴까? Halland 문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출토된 복장을 보면 크게 손상된 바 없이 원형 그대로 유지되어, 당시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아래 사진들은 박물관에서 촬영).


복장은 크게 4개로 나뉘는데, 머리에 썼던 두건(hood)은 늪지에 있다 보니 적갈색으로 변색된 형의 끝에 장식 끈이 달린 리리피프(liripipe) 스타일로 나왔다. 우리가 중세 시대 영화를 보면 두건 뒤에 긴 끈이 달려있는데 당시 유행한 장식이라 한다.


당시 바지를 입지 않는 대신 긴 부츠와 같은 타이츠(hosen)로 무릎에서 발까지 신었고, 양말이 개발되지 않아 오늘날 슬리퍼와 같은 발 감싸개(foot covering)를 이용했다. 또, 신발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41 사이즈(260mm)로 나타났다.


다음, 망토(cloak). 외투인 이것은 14세기까지 만해도 단추가 없었기 때문에 오른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오른쪽을 개방된 형태였고, 마치 오늘날 속옷 치마와 같은 웃옷(tunic) 위에 걸쳤다.


모두 울(wool)로 만든 소재의 망토와 웃옷을 입었으니 사망 당시 여름은 아니었을 것이며, 겨울이라면 가죽으로 된 옷을 걸쳤을 것이기에, 봄이나 가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복장의 부분별 사진과 설명(출처 : Halland주 박물관)


전체적으로 그가 입었던 옷감 재질이 당시 귀족들이 입었던 타 유럽 국가에서 수입된 재질이 아니라 스웨덴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되던 울(wool)이라는 점과 바느질 간격 등 기타 자료 등으로 종합할 때,


전문가들은 지역의 중류층 정도 인물로 성 안에 거주하면서 권력자에 의해 고용된 관리이거나 숙련공, 작가 등의 직업을 가진 인물로 1340~1370년 사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Uppsala 대학이 실시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carbon-14 dating)에서도 1290~1410년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연구에 참여한 고고학자들도 1350~1370 정도로 보았다.


전문가들은 지역의 중류층 정도 인물로 성 안에 거주하면서 권력자에 의해 고용된 관리이거나 숙련공, 작가 등의 직업을 가진 인물로 1340~1370년 사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Uppsala 대학이 실시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carbon-14 dating)에서도 1290~1410년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연구에 참여한 고고학자들도 1350~1370 정도로 보았다.


실제 스웨덴에서 출토된 유사한 시기 석상 등을 보면 두건을 두르고 망토를 걸친 일반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망토를 두른 중세 인물 석상(출처: BM 소개 책자)


한편, Bocksten Man의 신장과 나이 등 신체적 특징은 프로젝트에 참가한 유골 전문가(osteologist) Torbjorn Ahlstrom의 백골 분석을 통해 추정됐는데, 신장은 171cm 정도이며 30~35세가량의 오른손잡이라고 추정했다. 망토의 오른쪽 부분이 틔여 있던 점도 있었지만, 오른손 쪽의 근육 관련 부분(Muscular Attachments)이 왼손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근육 관련 부분들도 대부분 작아 체구는 보통보다 약간 마른 체형(slim build)이라고 추정됐다. 


그래서 14세기 대부분의 남자 육체 노동자들이었던 소작농(peasant)으로 보기 어렵고, 특히 당시 중류층 이상의 유골에서 발견되는 관절염의 일종인 DISH(diffuse idiopathic skeletal hyperostosis)의 초기 증세가 있었으며 손톱에도 영양 결핍으로 볼 수 있는 반응이 나타나지 않아 중류층 이상이라는 근거를 받쳐주었다.


 

자, 그럼 Bocksten Man은 왜 죽은 것일까.


찔린 자국이 선명한 상의와 함께 발견된 말뚝(출처 : Halland주 박물관)

중세의 매장 시에는 얼굴을 하늘 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Bocksten Man의 경우 땅에 얼굴이 처박힌 상태여서 일반적인 매장이라 볼 수 없다. 


출토된 옷의 상의에는 함께 발견된 말뚝(stake)으로 세 군데가 찔린 구멍이 나타났는데,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들은 이것은 사후에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구멍이 날 정도로 머리를 3회 강타당한 것인데 이는 아래턱, 왼쪽 귀, 뒷머리 순으로 나타나며, 후두부에 가장 큰 손상이 있다. 발견 당시 해골이 가죽과 같이 부드러워진 상태였지만 사인을 밝히는데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럼 찔린 자국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당시 전설에 따르면 죽은 사람이 영혼으로 되살아나 복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체에 이와 같은 행위를 종종 했었다고 한다.

 

특히 가슴을 찌른 말뚝은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참나무 소재의 이 말뚝은 중세시대의 지붕 건축에 주로 쓰였던 소재로, 나무의 나이테를 활용해 당시 상황을 추정하는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에 기초한 조사에 따르면 1299년 전후로 사용되어 농장 등에 있다가 나중에 Bocksten Man이 묻힌 곳으로 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따라 Bocksten Man은 발견된 늪지에서 죽은 게 아니라 인근에서 죽임을 당하고 늪지에서 매장당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이러한 말뚝을 사용하거나 사용에 익숙한 농노 계층의 사람이 Bocksten Man의 사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의 단서도 되었다.


이러한 단서를 뒷받침해주는 Bocksten 지역을 포함한 Åkulla 지방 일대의 전설도 있다.

1925년 발견 당시 Åkulla 일대(출처 : BM 설명 책자)

즉, Bocksten Man이 살해당한 시기는 덴마크-스웨덴 간의 전쟁이 한 참일 때여서 전쟁에 투입할 병사를 징발하는 지역 담당자들이 지역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 대상이 된 소작농들 중 하나가 그를 매우 싫어하고 기피하여 어느 날 죽이고 인근 늪지에 묻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그 이후 마을 근처-특히 묻은 늪지-에 귀신이 자주 출몰하고 동네 모든 개들이 늪지를 향해 밤새 울부짖어대는 일이 계속되자, 지역주민들은 그 늪지를 찾아가 시신을 찾고 그 위에 말뚝을 박아버렸으며, 이후 귀신의 출몰이나 개들의 울부짖음이 없어졌다는 전설이다.   


시신 위에 말뚝 박는 모습(출처 : Halland주 박물관)

Åkulla 지방은 1941년 지역 Yasjön 호수에서 철기시대 유물인 400여 개 질그릇 조각이 발견되는 등 과거부터 사람이 많이 살던 지역이다. 


Bocksten Man이 살았던 14세기, 덴마크와 스웨덴이 수차례 Varberg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다 보니 많은 병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징병을 담당해 인구가 많은 마을 일대를 돌아다니던 관리가 그 대상인 농노들에게 미움을 받아 살해당해 인근 늪지에 묻혔으며, 이를 알고 있던 살인자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Bocksten Man의 저주를 피하고자 매장한 곳을 찾아가 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왠지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전설을 과학이 입증했다고나 할까. 


Bocksten Man이 매장당한 모습을 완전히 복원한 모습(출처 : Halland주 박물관)


마지막으로 Bocksten Man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들은 발견된 해골 등을 바탕으로 그의 얼굴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2003년 시작했다. 여기에는 밀랍 인형 제작자나 성형외과 전문의 등 관련 분야의 세계 최고의 전문가와 3D 레이저 스캐닝과 같은 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 

Bocksten Man 안면 복원 과정(출처 : Bocksten Man 소개 책자)


이들은 해골 각 부분의 피부 두께를 계산하고 30개 주요 포인트를 잡아 엄격한 과학적 접근뿐만 아니라 예술적 터치를 가미하여 실리콘을 접합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를 2006년 발표하고 그 전시 모형을 Varberg성 내 Halland 문화역사박물관에 특별관을 마련해 전시해오고 있다. 


Bocksten Man 프로젝트는 1936년 시작된 이래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DNA 분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다양한 물리 화학적 분석기법이 적용되고 있다. 2021년 봄에는 그가 짙은 머리와 파란 눈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내기도 했고 캐나다와 그의 복장의 염색에 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완전히 복원되어 Varberg 성 내 Halland주 문화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Bocksten Man



발표를 다 들은 박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 뭐... 700년 전 살해당한 시신을 가지고 복원까지 했다니 재밌는 스토리네요.. 다만, 우리가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도 아닌데... 기업에 주는 무슨 교훈이 있을까요?" 


발표를 했던 박대신이 잠깐 뜸 들이다 답을 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우연히 86년 전 시골의 한 늪지에서 발견된 시신을 이렇게 국가 프로젝트로 까지 발전시킬 필요가 있나...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만, 이게 우리나라에서 발견됐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요. 아마 역사학계에서 잠깐 관심 가졌을 소식에 그쳤지 않았을까..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 싶다 김상중 말투),


아주 오래전 시신이라고 확인한데 그치지 않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그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86년이 지난 지금도 해오고 있는 집념과 그를 통해 지역 경찰, 기업인, 고고학자, 의사, 첨단 기술자들이 모여 고고학에 과학기술을 접목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스웨덴의 힘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Bocksten Man 전시관의 마지막 내용. 그들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하고 몇십 년이 걸리도록 돈이 되지 않을 프로젝트로 비춰질 지 몰라도, 이를 통해 스웨덴은 중세시대 시신을 완벽히 복원하는 기술을 확보하게 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고급 기술들은 다른 산업으로도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거든요. 


1961년 333년 전 스톡홀름 앞바다에서 침몰한 VASA전함을 인양한 스웨덴의 기술력은 당시에는 흥미거리에 불과했겠습니다만, 그 때 확보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천안함 침몰에 대한 조사에 미국, 영국, 호주에 이어 4번째로참여한 국가가 바로 스웨덴이었습니다. 남들은 쓸데없이 뭐 하는 거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들은 10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착실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입니다.


고작 몇 년을 투자해 노벨상을 바라거나 당장의 신기술을 통해 이익을 따지려는 우리와는 너무 다르지 않나요? 우리나라가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배터리도 20년이 넘게 투자했다지만, 과연 세계적인 기업의 장기 투자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언뜻 보면 Bocksten Man 프로젝트와 같이 바보 같은 일을 계속해나가고 있는 것이 근시안적 시각으로는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것이 수십 년째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스웨덴의 원동력이 아닌 지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기업을 비롯한 모든 기관들도 한 번쯤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옛날 파리에서 최초의 수소 기구를 띄울 때 누군가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이 발명품을 어디에다 쓴답니까?'라고 무시하면서 얘기하니까, 프랭클린이 '그럼 신생아는 어디에다 쓸까?'라고 했다잖아요. Bocksten Man 프로젝트 참가자가 남긴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New research technology and results of analysis have been developed over the years. We do not yet have all the answers, but almost every year a new piece of the puzzle is added to the murder mystery of the Bocksten Man."  



박사장이 어렵게 입을 뗐다.


"어... 그래... 내가 뭐 이 프로젝트가 뭐 어떻대? 좋다고. 나도 그 말하고 싶었어.. 허허.. (그래도 내가 사장인데 이렇게 당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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