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angpi Oct 16. 2023

오십은 처음이라...

01. 돋보기를 쓰다

내가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때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눈이 좀 안 좋아진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안경을 쓰면 좀 있어 보인다(?)는 허황된 생각도 반은 차지한 것 같다. 그래서 엄마 앞에서 멀쩡히 놓여있는 깍두기도 못 집는 척하고 다 보이는데도 안 보인다고 하다 보니, 엄마와 함께 안경점에 가서 금테 안경을 맞춘 것이 안경을 쓴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안경이 안 어울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얼굴이 크다는 점이었다. 내가 몇 번을 골라도 안경테가 얼굴에 너무 붙는다고 하자, 안경집 아저씨는 니가 대가리가 큰걸 어떡하냐라며 짜증을 냈다. 당시에 유행했던 인형극인 '모여라 꿈동산'이나 '대갈공명'이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는데, 안경 맞추는데도 장애가 되었다.


처음에 안경을 맞추고 조금 나았는데 당시는 금도금이 안 좋았는지 여름만 되면 얼굴 옆살에 딱 붙은 안경테가 땀 좀 나면 부식이 되면서 두드러기도 나는 등 여러모로 안 좋은 점이 많았다. 이후로 안경은 뭘 해도 참 불편한 존재였다. 그러면서 가끔 어른들이 돋보기안경을 쓴 걸 보면, 그냥 안경도 불편한데 무슨 돋보기까지 쓰지 하며 저걸 쓴다고 달라지나?라고 생각했었다.


안경을 쓰던 시절 사진들. 안 쓴 사진도 있지만, 안 써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찍은 거다.


세월이 흘러 안경은 나의 눈이 되었다. 불편함이 일상이 되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러던 2004년, 나는 이 지긋지긋한 불편함을 떨쳐내기 위해 라식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 수술이 초기여서 잘못받으면 큰일 난다는 등 여러 소문이 많았지만, 안경에서 해방되고자 결단을 내렸다. 수술 전 검사를 해보니 나는 각막이 너무 얇아 '라식'은 안되고 '라섹'만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라섹을 하고 당일날은 정말 너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한 달 동안 정말 산고의 고통 속에 점차 나의 눈이 안경을 쓰지 않고도 또렷하게 보이는 너무나도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안경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제 운동도 실컷 해도 되고, 더운 날 땀에 부식된 안경테에 피부 트러블도 없어도 되며, 큰 얼굴 탓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평생 한 일 중 제일 잘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라섹수술 했던 병원. 나에게는 다시 태어난 곳과 같았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나는 눈에 있어 아무 문제 없이 살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원래부터 안경을 안 썼던 사람으로 알고 안경을 쓴 사진을 보면 놀란다. 특별히 눈 영양제를 먹지 않는데도 시력검사를 하면 항상 1.0 이상 나왔다. 또래들보다 훨씬 좋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다.

 


올해, 나는 만으로 오십이 되는 해, 나는 새로 부임한 직원들과 점심시간에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웬만큼 남들과 칠 정도는 돼서 자신 있게 나섰는데, 치면서 뭔가 예전같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내 몸이 둔탁해졌다기보다, 뭔가 날아오는 공에 내가 초점을 못 맞추는 것 같았다. 분명 능숙하게 받아쳐야 할 것을 헛스윙하고 탁구채가 아닌 쥐고 있는 손가락에 맞는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참 좋아한다. 퇴직하면 꿈 중에 하나가 집에 조그맣더라도 나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동안 쌓아두고 풀지 못했던 책들을 읽는 것이 꿈일 만큼 틈나는 대로 책을 읽는다. 그런데, 6월 어느 날인가 주말에 책을 읽는데 또렷하지가 않았는데 다음날 출근해 서류를 보는데도 약간 거리를 둬야 잘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3년 전 한국에 들어갔을 때 노안이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남들 하는 얘기처럼 들었다. 또 어~ 나 노안 왔대~라고 하면 내가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은근 기대하는 것도 있었다. 24살에 직장 생활을 시작해 40이 넘어도 늘 '젊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싫었는데, 이제는 나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마치 중학교 때 안경 쓰면 좀 있어 보일 거라는 생각이 섞였던 것 같다.


한동안 몸이 안 좋아져서 그런가 부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너무 지속되는 것 같아 안과를 찾아갔는데, 도수가 약하더라도 돋보기안경을 하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받았다. 의사가 써준 안경 처방전을 가지고 안경점에 가서 안경을 맞추고 새로 써보니, 완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아마 라섹수술을 받고 한 달 후 느꼈던 그 놀라움에 견줄 만했다. 나는 그렇게 19년 만에 다시 안경잡이로 돌아왔다.


요즘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볼 때 안경을 쓴다. 다만, 직원들이 결재를 받으러 오거나 잠시 얘기하러 들어왔을 때 "어? 언제부터 안경 쓰셨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은 없다. 당신 나이에 돋보기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엔 사무실에서 쓰는 것을 주저했는데,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쓰고 있다. 물론 돋보기가 없으면 아예 안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편하다는 느낌을 준다.     

       


어느덧 출근하거나 퇴근할 때 안경을 꼭 챙기게 되었다. 아, 내가 어쩌다 돋보기를 쓰게 되었지?라는 자괴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안경이 있으니까 좀 책을 편하게 볼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언젠가는 나도 돋보기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다 보니 좀 어색하고 이상하긴 하다. 돋보기를 쓸 날은 한 60은 넘어서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눈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신체 기능의 많은 것이 그렇게 변해갔다. 내 몸만 그런가? 주변에 있던 친구들도 많이도 멀어져 갔고, 인간관계도 많이도 멀어져 갔다. 예전에는 추석 명절 때는 상사, 선배, 친구, 후배, 부하직원들에게 어떻게 다 안부를 전하지 하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부를 전하는 카톡이 오는 게 신기한 나이가 되었다. 물론 내가 고관대작이라면 그렇지는 않았겠지.


앞으로도 돋보기를 썼던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에 대해 내가 대응하는 방식은 어떻게 변할까. 솔직히 절망과 탄식이 없을 거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너무 아쉽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 또한 세월에 따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가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 크겠지. 하지만, 나는 그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더 기울어질 것 같다. 순응. 물론 나도 모른다. 어떻게 내가 받아들여질지를.


예전에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20대 가수들은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등등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노래를 많이 부르는 반면, 5~60대 가수들은 '내 나이가 어때서~', '다시 멋지게 살자~' 등 희망적인 노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령별로 죽음에 대해 실감할 수 있는 나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른 게 아닐까. 죽음을 실감할 수 있다면, 죽음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오십 대는 돋보기와 함께 찾아왔다. 나도 오십이 처음이라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것이 맞는 삶인지 모르겠다. 이는 죽을 만큼 미칠 것 같았던 사십 대의 방황과 또 다른 것 같다.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새로운 바이러스의 등장이랄까.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살아가야겠지. 힘내라고. 힘내라고. 그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bfJoV6Gbw      

신해철-나에게 쓰는 편지. 이 노래를 들으면 내 얘기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40대 남자의 일기(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