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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두 남자네_1

텐진여행_황제였던 남자, 황제처럼 살았던 남자의 집

by 티제이

텐진은 베이징에서 고속철로 30분 이면 닿는 곳이다.

우리 살던 아파트에서 텐진행 기차를 타러 역까지 가는 시간보다, 베이징에서 텐진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더 짧을 정도로 가까워서, 베이징에 살면서 우리 부부는 꽤 자주 천진/텐진에 다녀왔다. 주말을 보내러 가기도 하고, 배우자가 텐진으로 출장 가야 하면 나도 같이 갔다가 그는 일 보고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중국에서 나는 ‘잘’ 살았다. 배우자가 곁에 있었고, 몸뚱이 하나 누윌 집이 있으니까. 집도 뭐 겨우 둘 사는 데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에다가 각 방 마다 에어컨, TV를 다 갖췄다. 안방 화장실에는 자쿠지(!)욕조-뜨거운 물이 항상 부족해서 몇 번 써보려다가 실패했다--가, 서재방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있었다. 쓸데없이.

나는 집이 싫었다. 히터를 아무리 틀어도 발은 하염없이 시려운 이 집이 서러웠다. 촌스럽고 두꺼운 커튼이 찝찝했다. 서재는 창고방이 되었고, 피아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짐승 털이 범벅이 된 덮개 밑에 있어서 한 두 번 닦아내다가 포기했다. 현관문은 밀폐가 되지 않아 사방의 틈으로 거무튀튀한 먼지가 바람을 타고 쌩쌩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걸쇠도 없이 열쇠로 열고 닫는 허접한 문짝 뒤에 숨어 2년을 살았다. 얇은 문짝은 심지어 철제도 아니고 목판이어서, 모르는 사람이 쉬이 문을 따고 들어오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발자국 소리, 사람 목소리, 두 명이서 대화하는 소리, 전화통화 하는 소리, 다 들리고, 다 무서웠다. 옆 집 문 열리는 소리도 다 들려서, 저 열쇠 꽂는 소리가 이 집 문인지, 저 집 문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했다. 머리털은 바짝 서는데, 감히 문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집에 있는 것도 스트레스고, 어디 밖에 딱히 갈 데도 없었던 시간들. 두려움, 피곤, 짜증, 분노, 그리고 체념 끝에 다시 반복되는 사이클.

북경대에 다니고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남편이 혼자 집을 지킬 때가 종종 생겼다. 그제야 그도 문 뒤에서 들리는 저 발소리가 과연 내 배우자의 것인지, 몽둥이(?)를 든 범죄자의 것인지, 통제되지 않는 상상의 나래를 몸소 체험하셨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안방 문 뒤에 숨어 지켜보다가 나인 걸 확인해야만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것이다. 악의없이 생글생글한, 그 진절머리나는 걸음걸이로.

IMG_6795.JPG 천진(tianjin)의 야트막한 붉은 지붕의 근대 건축물과 높다란 현대건축물이 자아내는 풍경.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베이징 삼원교역 근처 대단지 아파트 3층에 있던 우리의 집은, 단 한 번도 내 맘에 쏙 든 적이 없었다. 나라면 이딴 집 고르지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여행이 끝날 때 즈음이면 항상 돌아가고 싶은 곳이어서, 시소같은 양가감정 사이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베이징으로 돌아오면, 하루 빨리 다시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무리 조건이 좋으면 뭐 하냔 말이다. 내 마음이 아니라는데. 온 몸이 거부하는데.


 베이징을 뒤로 하고 떠나 온 천진에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살았던 집과, 시안사변의 주인공이자 중국 공산당의 영웅이었던 장쉐량의 집을 같은 날 다 돌아보았다.

먼저 푸이의 생가에 대해 얘기하자면, 푸이의 생가는 버려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낡아빠진 폐가를 국가AAA급 관광지로 복원한 공간이다. 푸이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궁은 좀 유명해도, 그가 북경에서 쫓겨나자마자 머물었던 천진의 생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생가가 천진 내 일본 조계지에 위치했던 터라 해방 후 더욱 홀대받기도 했고, 중국이 푸이를 낭만적으로 보지 않아서기도 하다.

IMG_6849.JPG 흐린 겨울날이었다. 암울한 분위기는 역시 날씨 탓이리.

푸이의 생가는 ‘징위안(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부의고택’이라고 불러줄 법도 하건만, 아무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생가를 복원하면서도 집주인의 이름을 건물에 붙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만주국을 세우지 않았는가 말이다.

인간 푸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푸이라는 한 개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신중국은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황제]는 많은 관객들에게 묘한 향수와 더불어 시대적 풍파 속에서 개인의 인생이 어떻게 표류하였는가를 느끼게 해 주었지만, 그건 외부인의 관점에서나 가능한 감상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차원에서 보면 그는 구시대의 기득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피라미드 구조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했던 사람이다. 그를 연민하도록 가르칠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 중국에서 푸이는, 그저 잘못된 시절잘못된 선택을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한 역사 속 표본이다.

IMG_6851.JPG 징위안 전시실에서. 화장대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배우자가 찍어줬다.

푸이의 '근대성'으로 꼽을 게 있다면, 중국 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이혼’을 해냈다(?)는 점이다. 당시 전 황제의 이혼소송은 ‘혁명’이라 불릴 정도였다. 여성이 자기 배우자를, 그것도 정식 부인도 아닌 둘째부인이 그를 고소했으니 말이다.

푸이는 천진에서 두 명의 부인과 한 집에서 살았다. 푸이와 첫째부인, 즉 황후는 2층에서, 나중에 맞이했던 둘째 부인, 그러니까 황빈는 1층에서 생활했다. 한 집에서 생활했다고 해서 황후와 사이가 돈독하지는 않았다. 배우자와의 사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이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두 여자’를 좋아하지 않은 건 확실하다.

그건 두 여자 탓이 아니라고, 그 집에 사던 주인가족 세 명 중 가장 덜떨어진 사람은 푸이였다고, 전시실 곳곳에 놓인 설명판이 은연중에 속삭이고 있었다. 2층에 머물었던 완롱(첫째부인)은 좋은 가문 출신에 외국어도 하고 자전거도 타는 여자였고, 아래층에 살던 원슈(둘째부인)는 푸이에게 ‘일제에 항복하지 말아라’는 조언을 서슴치 않으며 독서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푸이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가, 반대로 그들이 푸이를 참아낼 수 없었던 걸까.

IMG_6823.JPG 텐진은 옛 조계구역이어서 지금도 서양식 건축물이 많다. 도로도 깔끔하게 정비해서 도보로 다니기도 좋다.

나는 어쨌든 푸이를 동정한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없는 공간을 ‘내 집’이라 부르며 살아야 했다는 부분에 제일 깊은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나야 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공간을 내 것 삼아 지내야 하는 배부른 고통은 이해한다. 부엌도 없이 화장실 하나 딸린 원룸에 살 때, 2평 남짓 되는 방을 룸메이트와 공유하며 살 때, 대여섯 명이서 한 아파트를 빌려 살 때가 더 좋았던 건, 내가 원하는 장소에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이 몇 개냐, 가구가 얼마나 좋으냐는 나라는 존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 한국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가구를 하나씩 늘려가고 돈을 모아 이사 할 때 마다 집을 조금씩 넓혀가는 상황이었다면, 중요했을지도. 하지만 중국에서의 타향살이는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끝날 것이었다. 적응은 하되 정은 붙이지 말아야 하는, 삶.

더 큰 문제는, ‘언제’ 끝나는지를 알 수 없어서, 기약도 없이 항상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헤어짐을 전제하고 사귀는 관계처럼 허무하고, 그렇다고 연예처럼 아예 시작도 안 해 버린다는 선택지도 없이, 이미 베이징 봉황성 아파트에 들어와 있으니, 사랑할 맘도 안 생기는데 떠날 수도 없는 집구석. 이놈의 집은 마치 못생긴 주제에 갖은 똥폼은 다 잡으며 ‘우리도 다른 커플들처럼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를 읊조리는 찌질이 같았다.

짜증나는 상황을, 나는 모두 공간 탓으로 돌렸지만, 내가 제일 싫었던 건 사실 나의 처지였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 자칫 학위과정을 시작했다가는 신랑놈은 한국에 돌아가버리고 혼자 중국에 남아야 할 수도 있었다. 타국에서 홀로 학위를 마무리할 용기는 없고, 양국을 왔다갔다 하며 연구할 체력도, 재력도 없고. 그런 주제에 놀 줄도 잘 모르는 몸뚱이. 가만히 있으면 온 몸에 가시가 돋는 그런 몸뚱이. 그런 몸뚱이를 하소연할 데도 없는 이 곳. 이 숨막히는 집구석.


생각해보면 여지껏 재수도, 휴학도, 취준에도 쉬지 않고 달려왔던 이유는,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었다. 공부 더 하기 싫어서 재수 안 했고, 취업하기 애매할 것 같아 곧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석사 따고 더 공부하기 싫어서 취업하는 식이었다. 세상에 싫은 것 투성이라 싫은 걸 피하려는 선택만 해 왔는데, 갑자기 최악 대신 선택할 차악이 남지 않았다. 대신 너 좋은 걸 직접 찾아서 하라니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싫은 게 더 눈에 띄었다. 베이징의 먼지, 냄새, 오염, 쓰레기, 그리고, 매일 싫은 소리만 하는 나에게 네가 질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네가 안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네가 없다는 공포, 걱정과 공포에 질린 낯선 나. 나는 원래 너 없이도 잘 살았는데, 이제 네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나의 모습이 싫었다. 처음부터 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나는 익숙한 삶을 영위했을텐데.

그래서 공감했다. 푸이도 그렇지 않았을까. 되고 싶어서 된 황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활마저도 본인이 원해서 끝난 게 아니잖아. 원하는 게 없을 땐 싫은 게 더 눈에 잘 띄는 법이고, 인간은 본래 최선을 추구하기보다 최악을 피하는 게 쉬우니, 푸이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본디 푸이 스스로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내가 그의 처지라면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푸이에게 자식이 없었던 건 정말이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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