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에게 수향마을이란
그물망 같은 수로가 깔린 푸르른 수향마을, 즉 수진(水鎭, 중국어 발음으로 쉐이전)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낯설고 로맨틱한 장소로 여겨진다. 근현대의 파랑 속에서 과거를 많이 상실한 중국이,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작용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수향마을이기 때문이다.
쉐이전에는 중국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중국의 모습이 다 있다. 중국의 이상이란, 유구한 역사, 중화의 번성과 안정적인 경제력이다. 쉐이전은 장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물류유통의 발달과 풍요로운 자본의 결과물이다. 특히 자본력의 발달은 문화융성을 자극하여 고급스러운 강남문화를 낳았다. 그리하여 현대 중국의 중심지는 북쪽에 있으나, 심리적 정체감은 남쪽문화에 가깝다. 중국인은 상상 속 중국, 이상화 된 중국의 모습을 수향마을에서 찾는다.
유유히 흐르는 물과 삐걱대며 떠가는 나룻배, 동그란 삿갓을 쓴 뱃사공이 동그랗게 높이 지은 다리 밑을 천천히 지나가는 풍경. 중국의 수향(水鄕)마을이라 하면 곧장 떠오르는 장면이다.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수로가 흐르고, 나룻배가 오가는 수로를 내려다보며 2, 3층짜리 기와지붕 아래서 차를 마시는 이국적인 정취는, 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국인에게도 낯선 경치다.
서울 사람이 전주 한옥마을이나 불국사와 석굴암 보러 경주에 놀러가듯, 중국인도 수향마을에 대한 강렬한 로망에 사로잡혀 여행을 떠난다. 그 열망이 어찌나 뜨거운지 중국은 아예 45억 위안, 그러니까 한국 돈으로는 약 7천억 원 넘게 투자해서 베이징 근처에 수향마을 테마파크까지 만들어버렸다. 바로 구베이쉐이전(古北水镇)이다.
구베이쉐이전, 또는 고북수진은 ‘북쪽에 위치한 옛 수향마을’이라는 뜻이다. 구베이쉐이전의 맨 앞 글자와 맨 뒷 글자인 ‘구전(古镇)’은 본디 역사적으로 물자 유통의 중심지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사실 수향마을은 전통적으로 중국 창강(长江) 남쪽, 그러니까 강남일대에서 발달한 독특한 주거문화므로, 겨울이면 모든 물이 얼어붙을 북쪽 일대는, 수향마을과 별 관련이 없는 게 맞다.
게다가 구베이쉐이전은 만리장성의 여러 구간 중 하나인 사마태(司马太, 중국어 발음으로 스마타이)장성을 끼고 조성되었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상징이자 오랑캐, 이방인, 침략자를 막기 위한 배타성의 증거로 여겨진다. 반면 구전, 즉 수향마을은 활발한 교역의 결과이자 풍요와 문화가 넘쳐나는 강남문화의 산물이다. 구베이쉐이전에서는 역사적으로나 자연환경적으로는 절대 성립 불가능한 풍경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탄생한 문화적 산물을 짬뽕시켜 만든 구베이쉐이전을, 형형색색의 깃발은 든 가이드들은 ‘남북문화의 융합’이라 표현한다. 중국 아닌 다른 나라였다면 융합은 무슨, 고증오류로 손가락질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중국은 고증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가장 ‘중국스러운’ 모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 결과, 중국의 아이콘인 만리장성과 또 다른 아이콘인 수향마을이 공존하는 구베이쉐이전이 탄생했다.
그래서인가, 구베이쉐이전에서 만나볼 수 있는 '중국의 아이콘'은 지역 뿐만 아니라 시대도 넘나들어 민국시대의 특징인 서양식 건축물도 구베이수전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눈에는 개화기를 거치며 서구화 된 건물이지만 정작 서양의 관점에서는 ‘중국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기 때문이다. 개화기 양식은 분명 독특한 요소기는 하지만, 역시 시대고증오류라는 문제가 있다.
건축양식이라는 하드웨어 뿐 아니라, 내부에서 사고파는 내용물, 즉 소프트웨어도 즐거운 혼종이기는 마찬가지다. 구베이수전 중심거리에는 한족의 전통의상인 한푸(汉服)를 빌려주는 가게와 만주족의 전통의상에서 유래한 치파오(旗袍)를 파는 가게가 줄줄이 늘어서있다. 한족 입장에서 만주족은 오랑캐고,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집단인데, 여기서는 ‘중국’이라는 타이틀 밑에 한통속으로 묶여 있다.
심지어 무협영화나 TV드라마 속 선녀님들이 입을 법한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의상도 대여중이니까, 치파오나 한푸는 애교다. 적잖은 관광객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코스튬을 갖춰 입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다. 그 풍경 속에는 일본이나 한국 관광지와는 또 다른 낯섦이 있다. 한복도 개량이 많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인들이 입고 다니는 의상은 사상 존재한 적 없는, 온전한 상상의 산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만화 속 주인공의 옷을 만들어 입는 코스프레처럼 말이다. 상상의 공간인 구베이쉐이전에 이토록 적절한 광경이 더 있겠는가.
이걸 조화라고 봐야 하나 모순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구베이수전을 접했을 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단순한 놀이동산이라기엔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민속촌이라기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한 요소가 너무 많이 혼재해 있었다. 나라면 조선 5대 궁궐에서 벽화를 보고 만든 신라시대 의상이나 고구려 의복을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좀 거슬릴 것 같다. 경주에서 한복을 입고 다니는 건 시대상 고증 오류는 아니니 개의치 않겠다.
하긴, 구베이쉐이전은 어차피 창조된 공간인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뭐, 어차피 테마파크니 즐기면 된다. 덕분에 구베이쉐이전에서는 중국 전역에 걸친 문화와 전 시대에 걸친 양식을 한 큐에 몽땅 만나볼 수 있다.
그 뿐인가. 핼러윈 때는 모든 상점이 호박과 마녀모자로 가게를 꾸몄다가, 12월이면 빨간 옷 입은 파란 눈의 산타할아버지 천지다. 구베이쉐이전 한 쪽에는 팔각목조탑이, 반대쪽에는 고딕양식 교회도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운영하는 교회가 아닌 세트장으로, 크리스마스 때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내가 그동안 너무 칼 같은 잣대를 남발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일상 대화에도 맞춤법에 집착하는 사람은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하던가. 나는 문화맞춤법에 너무 과민했는지도 모른다. 문화면 문화, 전통이면 전통이라고 정의하는 경계 내에 깔끔하게 딱 떨어져 맞아야만 편해서다.
맞춤법에 예민한 나는, 경복궁 근처에서 한 시간에 만원, 이만 원에 빌려 주는 알록달록한 의상들을 보며 근본 없는 복장이라 눈을 흘기기도 했다. 한푸도 같은 비난을 받는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겉모양에만 치중했다는 비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복장으로 널리 인식되는 치파오도, 사실은 20세기에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상하이 등지 조계지름 중심으로 탄생한 문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성의 몸을 그렇게 많이 드러내는 옷이 중국의 ‘전통’ 복장일리 만무하긴 하다. 중국의 적극적인 개방성과 문화수용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던 치파오는 이제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자체가 되었다.
치파오가 근현대 중국을 반영한다면, 한푸와 개량한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반영이다. 전통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유연하게 즐기는 모습이라고 해 두자. 세상의 다양한 면모 중 좋은 것만 취해 즐기겠다는데, 굳이 어깃장 놓지 않으리.
이 가게 저 가게 들여다보다가 나도 매대에 걸려있는 치파오를 뒤적뒤적 한 벌 집어들었다.
서양의 환상이 뾰족지붕의 하얗고 높다란 ‘캐슬’에서 반짝이는 왕관을 쓰고 우아한 의상을 뽐내는 왕국에 있다면, 중국의 환상은 구전에 있다. 공주옷을 빼입고 디즈니랜드에 놀러가는 아이처럼, 중국인들은 환상의 공간 속에서 전설 속 선녀님, 공주님, 황제나 신선이 된다. 나풀나풀한 날개옷과 부채가 흩날리는 진풍경 앞에서 얼핏 영화 속 타임워프를 떠올렸다. 다음 순간, 타임슬립보다는 도깨비나라로의 환상여행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제시하는 중국, 세상 어디에도 없는 중국.
구베이쉐이전은 역사상 존재했던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요소를 모두 담은, 철저한 상업 공간이다. 국가주도 관광산업은 이렇게 전통을, 혹은 진짜 전통이 아니더라도 ‘중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하려 애를 써도 솔직히 마음 속 깊은 곳으로는 문화유산 보존복원윤리에 더 익숙한 나라서, 결국 오리지날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구베이쉐이전의 오리지날인 우전에 가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주가각(朱家角, 중국어 발음은 주자자오)는, 의외로 중국인들에게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는 공간은 아니다. 주자자오가 뭔지 모르는 중국인들도 많다. 반면에 우전은 만리장성처럼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여겨진다. 심지어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은 근대에 들어 다 새로 복구한 거라 별 의미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우전만큼은 꼭 가봐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안타깝게도 베이징에서 우전까지는 전혀 가깝지 않았다. 상하이 근교 관광지로 알려진 우전은, 엄밀히 말하자면 쑤저우와 항저우, 그리고 상하이 사이에 위치한다. 베이징에서 직통으로 가는 방법은 없고, 중국 사람들도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단체패키지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뚜벅이 신세인 우리 부부는, 중국인이 그토록 사랑하는 우전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호기심만 한참 키웠더랬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