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진여행_황제였던 남자, 황제처럼 살았던 남자의 집
같은 시기의 인물인데, 푸이에 비하면 장쉐랑은 팔자가 펴도 제대로 폈다. 한국어 한자발음으로는 장학랑(张学良)인 장쉐량은 푸이보다 나이도 5살이나 많다. 그럼에도 장쉐랑은 강산이 세 번 하고도 더 바뀔 세월을 더 살았으며, 능동적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것도 명도 높은 자국을 남겼다. 그의 집은 깊은 고동색에, 지금까지도 귀티가 좔좔 흐르는 부잣집 티를 숨길 수가 없다.
옛 프랑스 조계구역에 자리한 장쉐량 생가의 공식 명칭은 장학량고거(故居)로, 그는 1920~30년대를 여기서 보냈다. 장쉐랑이 1901년생이니, 인생에서 제일 젊고 팔팔할 때를 천진에서 보낸 셈이다. 근데 우습게도 푸이도 20년대 중반에 천진에 와 7년가량을 살았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천진에서 서로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산 것이다. 그것도 조계지 구역에, 서양식 건물에, 심지어 매우 가까운 위치에.
푸이에게 천진은 쫓겨 온 곳이지만, 장쉐량에게 천진은 나쁠 것이 없는 곳이었다. 푸이가 만주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때, 원래가 만주지역 군벌 출신이었던 장쉐량은 반일항쟁을 진두지휘 했다. 나 같은 외국인의 시선에는 군벌이나 황제나 백성 위에 군림하는 기득권이기는 매한가지로 보이나, 한 명은 시대에 끌려 다녔고 다른 한 명은 시대를 이끌었기에, 중국에서는 둘을 절대 같은 선상에 두지 않는다.
장쉐량은 중국 공산당의 전환점이 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신중국을 빚은 몇 가지 굵직한 사건들 중 하나인 시안사변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바로 시안사변은 공산당의 대척점인 국민당의 우두머리 장제스를 잡아 가둔 사건이다.
냉전시절의 이념갈등이 잔재하는 한국에서는 대만의 장제스를 나쁘게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산당이 집권한 중국에서는, 동족인 공산당을 일본보다 견제하고, 후퇴하면서 각종 유물을 싹 들고 물 건너 대만으로 튄 장제스를 곱게 볼 이유가 없다. 때문에 중국인에게 장쉐량은 그런 장제스의 뒤통수를 쳐 국공합작을 이룬 공산당의 영웅이다. 그 결과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이 이뤄져 민족의 영웅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깨작깨작 글이나 읽고 쓰던 푸이와 달리 장쉐량은 실천력 있는 군인이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산당이 군인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의 집에는 전쟁 때 썼던, 선물 받은 총과 칼이 있다. 도로가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는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고, 3층에는 무대와 스탠딩바를 갖춘 연회장이 있다. 그는 진정 "시대의 인싸"였던 것이다.
반짝이는 스테인드유리와 바로크풍 벽지로 꾸민 파티룸, 누구누구가 선물한 그림과 글씨를 걸어놓은 방, 어디어디에서 공수한 벽지. 짙은 단색의 가구 때문에 검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부족함 없이 잘 살았던 집이다. 2층에는 그의 부인을 봉황에 비유하여 꾸민 공간도 있다. 봉황인 아내보다 높은 남편은 곧 황제와 같음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다.
황제라. 20세기 초반 같은 시기에,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푸이가 살던 동네에, 황제처럼 추앙받던 장쉐랑이 살았다. 오고 가면서 얼굴 정도는 마주치지 않았을까. 서로 우연히 눈이 마주치고 사진으로 보던 얼굴을 알아보고는 흠칫 모르는 척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혹은 장쉐량의 파티에 초청 받지는 않았을까. 예의상 초청과 체면상 불참이 자연스레 한 번 정도는 있었을 법도 하니. 당당하지만 거만하지는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빛나는 장쉐량과, 그 곁에서 더욱 비참했을 푸이를 상상했다.
장쉐랑은 장제스를 배신 때린 죄로 10년 감금형을 받고 가택연금 당했다지만, 대만에서도 여기 천진생가 정도 되는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일꾼 부리며 살았다면, 뭐 굳이 집 밖에 안 나가도 만족스런 삶이었을 테지. 삶이 오죽 만족스러웠으면 말년을 하와이에서 보내며 100세 넘게 장수했을까 말이다. 푸이는 예순에 죽었는데. 그래서 사람은 다 풀고 살아야 한다. 속에 맺힌 게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 그게 분노건, 슬픔이건, 한이던 간에 결국 언젠가는 터지거나, 아니면 본인이 속 터져 죽거나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면 가슴에 담아두면 안 된다.
담아두면 안 되는 건, 하고 싶은 일이나 하기 싫은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장쉐량은 싫은 건 싫다고, 좋은 건 좋다고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크게는 일제는 싫고, 민족은 좋고. 명예를 중시하고 번잡스러운 건 싫어하고. 그래서 그의 집이 ‘꾸안꾸’ 스타일인가보다. 그는 자신의 호불호를 명확하게 인지했던 사람이다.
나는 ‘불호’만 확실한데, 싫은 걸 피하려다보면 사람이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야 능동성이 생긴다. 그러나 인간사 당장의 크고 작은 고통을 피하려다 보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을 여유가 없다. 돌에 좀 맞아도 피부가 좀 긁혀도 굴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고 움직였으면 좋았으련만,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가 어느새 낭떠러지 끝까지 쫓겨 온 사람을, 푸이를, 나는 뭐라 더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푸이를 옹호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낡고 버려졌던 푸이의 생가를 비단과 고급가구로 복원해 놨다. 실제로 남아있는 사진 및 문헌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거니까 가짜로 만들어 낸 공주님, 왕자님방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자금성에서 쫓겨났대서 비루하게 살았을거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이렇게 널따란 정원이 딸린 저택에 부인을 둘이나 두고 하인도 여럿 거느리면서 등 따숩고 배부르게 지냈다고 하면, 푸이의 고뇌와 역경은 그저 부르주아의 속없는 소리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각 방마다 걸려 있는 복원하기 전 모습을 찍은 사진은, 벽지와 바닥재는 사라지고 낡은 시멘트벽이 드러난 방, 벽난로에 불을 떼던 흔적이 시커멓게 남은 벽과 처량하게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담고 있었다. 창문은 깨지고 가구는 부서졌다. 반면 장쉐량의 집을 보란 말이다. 이렇게 호화롭게 살아도 기득권이라 비난하지 않다니.
까놓고 말해 솔직히 장쉐량은 군벌집안 장남이니 집에 돈이 모자랐겠나, 힘이 모자랐겠나. 군벌집안도 보통 집안이 아니어서 장쉐량의 아버지 장쭈오린은 심지어 만주지역 봉계군벌의 '리더'였다. 얘네 집은 위안스카이 사망 후 만주에서 베이징 일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떨치던 가문이란 말이다. 그 배경만 놓고 보더라도 어린 나이에 질질 끌려가던 푸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장쉐량의 항일정신과 민족정신만을 높게 평가해도 되는건가. 배경이 이렇게 다른데?
어린 나이라고 하니 언젠가 사촌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야, 누가 주변에서 자꾸 구겨줘야 구김살이 생기지.
"어려움 없이 잘 크면 성격도 좋고 속이 꼬인 데가 없다니까. 부잣집 앤데 성격이 나쁘다면, 그건 본래는 진짜 부자가 아닌 거야. 진짜 가문 출신들은 교육도 잘 받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서 인간성이 나쁠 수가 없다구."
언니, 어쩜 이렇게 옳은 소리만 하십니까.
장쉐량의 실제 성격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푸이가 속이 많이 꼬였는지 어쨌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장쉐량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고, 푸이는 확실히 그러지 못했다. 장쉐량이 일본에 저항하고, 잘 나가던 장제스의 뒤통수를 호기롭게 쌔려도 멀쩡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장쉐량의 집은 부럽고, 푸이의 집은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나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자를 동경한다.
뭐, 현실에는 장쉐량보다 푸이처럼 시대에 쫓기고 병들어가며 사는 사람이 더 많겠지. 나처럼. 장쉐량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현실은 푸이지만, 적어도 이제는 차악을 붙잡으려 아등바등 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여유있는 척, 인생이 던지는 돌을 직시해야겠다. 언젠가는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헤매지 않고, 원하는 게 뭔지 명확하게 밝힐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