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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Apr 12. 2021

치키치키 차카차카 차칸 며느리

'착한' 며느리 되기 쉬운 세상


어 시어머니가 이 꽃 좋아했는데

  -여 착한 며느리네

다음 주말에 시부모님이랑 근교에 좀 다녀올라고

  -오 착한 며느리군

 시아버지 환갑 기념으로 남편 동생까지 포함해서 다 같이 해외여행 다녀왔어

  -와 완전 효부네 효부

 

 착한 딸 소리도 듣기 싫었는데, 착한 며느리라니. 


 [착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착한 아이, 착한 학생, 착한 친구, 그 무엇도, 머리가 좀 크고 난 다음에는 되고 싶지 않았다.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울했다. 혹은 분노했다. 네가 뭔데 나보고 착하대? 네가 날 알아? 아니,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야. 

착하다 [형용사]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사람이나 그 마음이) 곱고 어질다. 
-(가격이) 품질이나 성능에 비해 싸다.                                        

 차라리 나쁜 여자로 살고 싶었다.

 제 앞가림하는 여자, 희생당하지 않는 여자, 그리고 능력 있는 여자. 순종적이기보다는 드세서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에게 '나쁘다'는 딱지가 붙는다면, 그런 주홍글씨라면 나도 갖고 싶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느새 착한 며느리 소리까지 듣는 걸 보면 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은 이유는, '착하다'가 사전적 정의대로 쓰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상징과 은유, 함축이란 도구를 사용해서 복잡하게 살아가는 동물이다. 빨강과 파랑은 정치색을 표현하고 대답 없는 미소는 거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착하다'는 상냥하다기보다 부족하다는 의미로 쓰여서 사람을 거절할 때 주로 애용된다.

 '착하다'는 위계구조까지 내포한다. 가격이 착하다거나 외모가 착하다는 쓰임에서는 불편한 냄새가 난다. 돈 쓰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 가격,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으로서 기분이 좋다는 의미의 '착하다'는 표현에는 권위가 배어 있다.

 어른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착한 딸, 그리고 착한 며느리.


 착한 며느리라는 직함은 무슨 기준으로 내려진 걸까. '효부(잘 섬기는 며느리)'라는 단어는 있어도 '효서(잘 섬기는 사위)'는 없다. 대신 '현서(어진 사위)'는 실존하는 단어다. '어질다'는 '착하다'와 달리 '슬기롭고 덕이 높다'는 뜻이지만 '섬기다'는 윗사람을 잘 모신다는 의미라 며느리에게 더 잘 어울렸나 보다. 

 가정과 가족을 향한 충실도가 착함의 기준이라면, 나는 '착하다'는 형용사가 두렵다. '가정에 충실한 사람'과 달리 '가정에 충실한 여자'는 칭찬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가정적인 남자'를 비난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권위주의자가 되지만 '가정적인 여자'는 권위주의에 종속된 존재, 보수적이고 어쩌면 교육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인상까지 준다. 

 '착함'은 그렇게, 아주 쉽게 거부감의 대상이 된다. 한쪽에서는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위치한 존재로 여겨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조리에 순응하고 구조를 강화하는 앞잡이로 여겨질까 두렵다.

 이 사회가 나를 거부한다고 해서, 원한 적도 없었던 '착하다'는 꼬리표를 달아 놓고 내 존재를 정의한다고 해서, 안타깝게도 나는 눈을 부라리면서 네가 뭔데?라고 할 만큼 '나쁜' 사람이 못 된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나쁘게 사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나는 그 노력에 수반될 고통도 미리 두렵다. 착한 것도 두렵고 노력도 두려워서 오늘도 하늘이 어둡다. 


 착한 며느리도 악처만 못하다고, 남편은 제 마누라가 '나쁜 아내'이기를 기대한다(물론 속담의 본 뜻과는 거리가 멀다).

 착한 건 불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시대라 남편은 아직도 가부장제와 이상적인 가족상 사이에서 몇 년째 헤매는 중이다. 내 엄마의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고, 시어머니의 남편도 왕도를 찾은 것 같지는 않다.

 그나마 나에게 착하다는 칭찬을 못 쓰게 하는 건 엄마들이다. 내 남편의 엄마는 며느리가 착하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행동하는 것뿐이라고 말을 잘랐다.

 의중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남의 집 며느리는 저렇던데 우리 집 며느리는 이렇게 착하다는 식의 비교는 우선 그 사람 없는 자리에서 흉을 보는 셈이다. 무엇보다 '착하다'에서는 권력의 향기가 풍긴다. 어머니는 위력을 이해하기 거부하는 축에 속한다. 


 '착함'은 개인의 노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다. 내가 착한 딸, 착한 며느리로 남을 수 있는 건 '현부(賢婦)'들 덕분인데, '현부'는 다른 단어들과 달리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어진 며느리'와 '어진 아내'.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lVXdvblhK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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