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제이 Apr 22. 2021

게으르다는 건 강하다는 것

강해야만 게으를 수 있다

 신랑은 태산같이 쌓인 설거지 앞에서 폰을 뒤적이더니 멜론을 켰다. 브런치 라디오였다. 재미없을 것 같은데,라고 했는데도 그는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설거지 물소리에도 방해받지 않고 듣기 위해서였다. 넓지도 않은 집구석, 부엌에서 시작된 라디오 소리는 샤워소리까지 뚫고 들어와서 본의 아니게 BJ와 함께 샤워를 마쳤다. 

너라면 죽었을 거야

 라디오가 끝나자 신랑이 말했다. 

뭐? 내가 물었다.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뜬금없이 죽음을 논하다니.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리송했다. 그는 종종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연산과정을 모두 건너뛴 말을 내뱉고는 해서, 이번에도 나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진작에 병이 나고 말았을 거야

 아, 그래. 그런 맥락이라면.


 라디오 속 사연의 주인공은 집에서 집으로 출근하는 집순이였다. 무기력에 짓눌려 몸과 마음으로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조곤조곤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집에서도 쉴 틈 없이 바쁘지. 맞아, 그때 많이 아팠지.

 [오늘도 집순이로 알차게 살았습니다]의 저자는 집구석의 속도를 발판 삼아 일상을 세워 올렸지만, 신랑이 볼 때 나는 집구석에 갉아 먹히고 있었다.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고, 아무리 먹여놓고 뉘어 놓아도 살이 자꾸 빠졌다. 식비보다 병원비가 더 나갈 기세였다.

 나에겐 집안일이 너무 무거웠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빨래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빨래를 걷고 빨래를 개켜서 서랍에 넣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어렵지는 않지만 소모적인 데다가 대충 했다가는 피부질환으로 보복받았다. 청소도 마찬가지였다. 괜찮겠지, 하고 청소를 미루면 기관지와 피부가 먼저 반응을 했다. 

 그 와중에 더러워지는 속도와 더러움의 양이 곱빼기였다. 혼자 살 때는 1인분만 해치우면 되었는데 이제는 남편이 벗어 놓은 양말과 소파에 벗어두고 간 어제 입은 옷과 바닥에서 뒹굴거리던 그대로 두고 간 담요를 주우러 다니느라 2인분 어치 원금에 붙는 이자처럼 노동량이 조금씩 더 들었다. 

 운동과 달리 노동은 소모적이어서 체력이 달리는 게 느껴졌다. 부지런해서 힘이 들었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병이 났다. 모르는 사람은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핀잔을 줬지만 곁에서 보던 신랑은 말했다.

너 같은 약골은 살아남을 수 없다구. 멸종위기종 같은 거지. 그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거야.
 이제부터 너는 티제이가 아니라 티그리사우르스다.

 약골이라고 놀려먹는 말에도 나는 좀 고마웠다. 나의 고통을 거짓으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 같은 취급에는 약간의 죄책감과 더 많은 책임감이 묻어 있다. 고래나 북극곰이 정말 물리적으로 약해서 멸종될 위험에 처한 건 아니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과 통증, 내가 처한 상황을 가볍게 여기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 뿐이라고.

 나에겐 집구석이 영 안 맞나 보다. 


 적성으로 따지자면 집순이는 나보다는 신랑에게 더 잘 어울린다. 체력도 좋고 관절 쑤셔하는 일도 없다. 요리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잘 미루고 잘 쉴 줄 안다. 집안일은 적당히 잘 미루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XMg8GBzNmgA

  처음에는 겨우 빨래 한 번 널고는 두세 시간 동안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같은 자세로 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꼴에 화가 났다. 너는 혼자서는 자기 관리가 전혀 안 되는구나 싶어 한심했는데, 이제는 부럽다.

 6시간째 누워 있어도 두통도 없고 허리도 안 아프다니. 그 6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셔도 방광염 걱정은커녕 변비도 없다니. 이틀 치 설거지에도 손목이 아프지 않다니.  오늘 하루 허투루 낭비했다는 자괴감에 휩싸이지 않고 오히려 잘 쉬었다며 뿌듯해하는 표정이라니.

 하, 부럽다.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n-b4wcNr4Jc

 허리 통증 따위가 아니었다면 나도 좀 더 게으를 수 있었을까. 집구석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방황했겠지. '생산적'이라 정의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 했을 것이다. 그랬던 것 같다. 아니, 그랬다. 

 게으름도 아무나 피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해도 버틸 수 있는 체력과 피지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리고 게으른 자신에 위축되지 않을 탄탄한 자존감과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찾아오는 공허함, 불안감은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볼모 삼아 사람을 부려먹는다. 몸도 마음도 튼튼해서 집에서도 밖에서도 마냥 자유로운 신랑이 부럽다.

 강한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몸뚱이는 여전히 비루하지만 이제는 신랑도 청소 실력이 꽤 늘었으니까 나도 조금 더 강해져 보도록 할까. 조금 더 게을러질 수 있을까.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lVCHfXn3VME



작가의 이전글 치키치키 차카차카 차칸 며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