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는데, 없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나에게는 너무 미안하다는 그 말
근데, 저는 진심으로, 정말이지 괜찮습니다만...
같이 여행을 계획한 작가님에게 일이 생겼다. 언니에게는 좋은 일인데,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언니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른다.
고작가가 이토록 미안해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언니가 먼저 제안한 여행이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언니의 일정에 전적으로 맞췄으며, 숙소를 몇 번 인가 변경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예약했다가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려는데, 그 때 되서는 예약일정이 안 맞아 몇 번인가 이 펜션에서 저 펜션으로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기는 했다.
그러긴 했지만,
수정은 길어야 하루 이틀 안에 다 해결 되었으며, 보통 이정도의 시행착오는 준비 과정에서 겪기 마련이라고, 가서 겪는 것 보다야 훨씬 즐겁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혼여행조차도 세 번에 걸친 대대적인 예약과 취소를 반복한 경험도 있어서, 이정도 사안에는 별 감정소모가 없었다.
거기다 마지막 변동사항으로 인해 오롯이 홀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니, 이건 설상가상이라기보다 금상첨화이므로,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우도에서 이틀밤을 함께 보냈다. 언니가 우도를 떠나는 날, 나는 성산항까지 같이 배를 타고 나가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기념품을 산 뒤, 공항행 버스를 반 시간 동안 같이 기다렸다. 언니는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했지만, 나는 몇 시간 뒤면 맞이할 '홀로시간'이 기대될 뿐이었다. 무던해서라기보다, 순간이 소중해서.
같이 있을 땐 함께라는 순간에만 집중하고 싶다. 나만 존재하는 그 순간엔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다. 과거나 미래를 떠올리지 않고 그 당장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싶다.
홀로. 혼자 있으면 운동화의 속도 대로 걸어도 된다. 혼자라면 헤매도 된다. 우도로 돌아오는 배에서 우도 지도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짚어 보았다. 걸을 생각이었다. 천진항의 구석구석이 또렷하게 보이는 시점부터 나는 당장이고 뛰쳐나갈 마음으로 뱃머리 끄트머리에서 서성였다. 신랑이 생일선물로 사 준 운동화의 두꺼운 바닥을 오늘 당장에라도 맨들맨들 닳게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점점 들떴다.
우도페리가 천진항에 닿는 순간, 내일까지 뭘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고민할 것도 없이 발이 먼저 움직였다. 앞으로, 앞으로 주저없이 굴러가는 발걸음에, 바쁘고 소란스러웠던 항구가 점점 뒤로 밀려났다.
혼자니까, 우도에 남겨진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일지니.
그 동안 언니와는 올레길을 조금 걸었고, 순환버스를 몇 번 탔으며, 네 시간 정도 전동차를 탔다. 언니는 항상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타입인데다가 겁이 많았다. 구불구불 좁은 우도의 길은 오전 10시 경 부터 한 6시간 동안 전동차와 전기자전거, 스쿠터, 자가용, 공사차량과 버스 등등이 한 가득이라, 둘이 나란히 걸어다니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산을 좋아하는 고리타분한 영혼이 된지라, 정말이지 걷고 싶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우도의 하늘 밑에서, 야트막한 언덕의 꼭지점인 우도 한 가운데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이렇게 하늘을 보고 걸을 일이 별로 없잖아요. 여기서는 앞을 보고 가니까, 이렇게 가슴을 열고 가니까, 바로 앞에 하늘이 보이니까, 바람이 불어서 좋아요, 저는.
나도 어렸을 적 부터 하늘 보는 걸 좋아했어, 고작가의 애정어린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신이 나서 걸었다. 사랑어린 운동화는 또 에징간히도 튼튼해서, 보폭이 점점 더 넓어졌다. 관광객이 빠져나가기 시작할 시점이라 전동차도 대부분 해안도로로 모여드는 타이밍이었다. 우도 정중앙에 위치한 면사무소로 가는 길은 더할나위 없이 걷기 좋았다.
그렇게 우도 한 가운데를 세로로 횡단하는 데 30분 밖에 안 걸렸다. 중간에 사진도 찍고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려 물 한 병 맥주 한 캔도 샀는데도 그랬다.
무릎이 뻐근해 올 법도 한데, 속도를 줄이고 싶지는 않았다. 때로는 느릿한 걸음에 갑자기 지쳐버릴지 모르니까 배꼽에 더욱 힘을 주고 어깨 힘을 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언어가 차오르고 차오르는 언어 속에 또 마음껏 걸었다. 괴테가 왜 그렇게 긴 산책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이델베르크에 갔을 때 ‘철학자의 길’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같으면, 홀로라면, 완주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에 고개를 들면 지평선 위에 수평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야를 삼등분하는 두 개의 선을 보고 있자니, 맨 아랫칸에는 자잘한 소음이 얕게 깔려 있고, 가운데에는 뱃고동소리가 드문드문했다. 맨 윗칸은 햇살이 쨍쨍해서 눈을 감아도 눈이 부셨다.
우도의 햇살은 그렇게나 눈부셨다.
그렇게 홀로 걷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문을 걸어잠금과 동시에 훌렁훌렁 허물을 벗어던지면서 그대로 화장실로 직진했다.
찬물과 뜨거운물을 오락가락 세심하게 온도를 맞추고, 빽빽한 머리숱 구석구석 물을 잔뜩 적셨다. 물을 잠그지 않은 채 샴푸칠을 하면서 어제 지나가던 애들이 부르던 트로트를 흥얼거렸다.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짜서 거품을 내어 팔에 문질렀다. 어깨에 선크림을 많이 발라서 거품이 금방 떨어졌다. 다시 바디워시를 짜서 반대쪽 어깨에 거품을 구석구석 문지르고, 또 바디워시를 짜서 다리에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꼬물꼬물 문지르며 정말 개운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마와 콧잔등을 집중적으로 둥글둥글 세안하기를 마치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아무도 없으니까, 그대로 아까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에 온 몸을 맡겼다. 수건도 넉넉하고, 생수도 사왔겠다,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가 서빈백사에서 뭍혀 온 산호조각이 발에 밟혔다. 모래도 아니고 돌도 아닌 작고 하얀 조각을 손끝으로 꾹 눌러 집어들고 테이블 한 쪽에 털어놨다. 침대에 들어가니 다리가 무거웠다. 간신히 맥주를 따기는 땄는데, 몇 모금 못 마셨다. 모기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곤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