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소리 대신 숨비소리
제주에 도착한 첫날은
빗방울이 조금 흩뿌리는 날씨 었다.
회색 하늘은 땅에서 멀지 않았고, 구름은 달처럼 바다를 당기는 성질이 있는지 파도가 일었다. 우도로 배 타고 넘어가야 하는데, 1시간 넘게 빨간 버스를 타고 성산항까지 오는 길에도 멀미를 꽤 한 터라 더럭 겁이 났다.
우도에는 12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어둑하고 잔비가 흩날리는데도 나는 미간에 계속 힘을 주고 있었다. 흐려도 눈은 부신, 그런 날이었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사방에 가득해서, 낯설었다. 제주가 이렇게 낯선 곳이었나, 이렇게 먼 땅이었음을 새삼 깨닫고는,
밤새 파도소리를 덮고 잤다.
우도는 시골이고, 시골은 조용하다. 시골에는 도시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전신주가 있고, 검은 전선이 끊김 없이 이어지고는 한다. 골목을 걷다 보면 저쪽 집에서 개가 짖고, 또 저쪽 집 개도 짖는다. 어린아이라면 겁을 잔뜩 집어 먹을 만한 우렁찬 위협에서
다 늙은 나는 이제 두려움과 소심함을 읽는다.
전라남도 끝자락 어드메에 웅그리고 있는 나의 시골도 그랬다. 야트막한 담벼락, 낯은 지붕, 그 너머 하늘, 하늘을 가르는 전깃줄까지, 그리고 저 멀리 들려오는 트랙터 소리와 뒷짐 진 팔자걸음이 모두 시골의 그것이었다.
다만 우도는 제주여서 돌에도, 담에도 구멍이 숭숭이었고, 요상한 사자머리 같은 손잡이가 달린 파랗거나 퍼런 대문이 없었다.
그리고 우도는 제주여서 바람이 엄청 불었다.
이 바람을, 어떻게 어떻게 이 바람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바람이 어찌나 많이 불던지, 제주 사람들이 이웃 간 믿음이 깊어서가 아니라 문짝이 바람에 남아나질 않아서 현관을 없애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피스 하나 가져간 건 결국 잠옷으로만 입었고, 전동스쿠터를 타고 달릴 땐 체온을 너무 뺏겨 춥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바람이 이렇게나 부는 것 치고는 바다는 잠잠한 편이었다. 강릉에서 이 정도 바람이었다면 파도 부서지는 소리에 목소리가 다 날렸을 텐데, 남해바다는 친절하게도 물결마저 따뜻했다. 이래서 남해바다, 남해바다 하는구나.
그리고 남해바다에는 해녀가 있다.
우리가 머물던 펜션에서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해녀의 집]이 있었다. 지도를 보고 숙소를 예약할 땐 신선하고 맛난 해산물 먹을 생각만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숙소 바로 앞바다에서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다큐에서만 보던 물질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제주 여행 때 잠수복을 입고 어망을 둘러멘 해녀를 종종 보기는 했다. 저 멀리 떠 있는 부표 밑에는 해녀가 있다고, 멀찌감치서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얕은 바다에서 오르락내리락 몸을 풀던 해녀들이 조금 더 멀리, 그리고 또 멀리 서서히 나아가는 전 과정은 처음 봤다. 다큐에서도 못 봤던 장면에 호기심이 일었다.
언니, 저기, 해녀들이에요.
언니, 방금 그거, 소리 들었어요?
작은 동그라미가 빨갛고 조금 더 큰 동그라미 근처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조금씩 멀어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가,
숨비소리를 들었다.
멀찍이서 그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새소리인가 했는데, 그러고 보니 바닷가인데도 갈매기가 보이지 않았다. 새일 리 없었다. 돌고래소리 같은 높은음이 한 번 더 들렸다. 휘파람이라기엔 너무 높고 청아한 음색이라 피리소리에 가까웠다.
이게, 그
숨비소리구나.
깊은 잠수 끝에 공기를 마주하는 삶과 생명의 소리라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가늘고 긴 깃털 같은 소리라, 전신주에서 전신주 사이에서 길게 흔들리는 검고 가는 전선이 떠올랐다. 소리 신작로와 전봇대처럼 사라져 갈 것들은 모두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는가 보다.
우도 한가운데로 가로질러 걷다 보니 작은 섬인데도 파도소리가 멀찌감치로 물러났다. 덕분에 길 위에는 어느새 나와 햇살밖에 남지 않아서, 허전했다. 이렇게 쪼아 내리는 햇살 아래라면 자고로
매미가 떼로 좀 울어 싸야 하는데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신 파도와 바람과 그리고 바람인지 파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숨비소리가 우도의 파란 하늘을 맴돌 뿐이다.
나중에 어디선가 강원도를 비롯해서 육지 쪽에도 해녀가 소수 남았다는 글을 보았다.
육지에서도 숨비소리가 들릴까?
우도에는 바람과 파도 말고는 소음이랄 게 없어서 숨비소리가 빈자리를 메웠는데, 육지의 여름은 찢을듯한 매미소리가 자랑이니까, 아무래도 안 들릴 성싶다.